한국 디자인, 세계를 비추다_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

◼︎ 『아트인컬처』 2025년 10월호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25) 전경. 사진: 김일다

프리즈 서울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서울이 글로벌 아트마켓 허브로서 지닌 위상은 확고해졌다. 올해의 서울 아트위크는 이 역동적인 지형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바로 세계 최정상급 공예·디자인 아트페어 디자인마이애미(Design Miami)의 아시아 첫 상륙이다. 디자인마이애미는 로컬 아이덴티티에 주목하는 ‘인 시추(In Situ)’ 프로그램의 첫 도시로 서울을 택하고 그룹전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를 열었다. 전통과 현대의 교차를 주제로 국내외 갤러리 16곳에서 71인의 작가가 170여 점을 공개했다. ‘컬렉터블 디자인’이 아직 본격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한국 시장에서, 소장 가치를 지니는 디자인이라는 낯선 화두를 던졌다.

디자인마이애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컬렉터블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컬렉터블 디자인이란 기능을 넘어 예술적 가치와 희소성을 지닌 디자인 ‘작품’을 의미한다. 한정판으로 제작되거나 작가의 철학이 담긴 가구, 조명, 오브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미술품처럼 갤러리를 통해 거래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상승하기도 한다. 2005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시작된 디자인마이애미는 바로 이 컬렉터블 디자인 시장을 형성하고 주도해 온 핵심적인 무대다. 매년 12월 마이애미비치와 6월 바젤, 10월 파리에서 열리는 페어에는 세계 유수의 갤러리가 참여해 뮤지엄 수준의 20~21세기 디자인작품을 선보인다. 디자이너와 갤러리스트, 컬렉터와 비평가가 한자리에 모여 동시대디자인의 흐름을 논하고 미래를 가늠하는, 명실상부한 ‘디자인계의 올림픽’인 셈이다.

한국 컬렉터블 디자인의 현주소

<창작의 빛>전은 기존 페어와는 다른 ‘인 시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열렸다. 장터가 아닌 전시의 형식을 택했다. 라틴어로 ‘제자리에서’를 의미하는 인 시추는 지역의 디자인 커뮤니티가 지닌 고유한 독창성과 다양성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육성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그 첫 번째 주자로 서울을 호명한 것은 단순한 마켓 테스트를 넘어서는 적극적 신호로 읽힌다. 최근 K-컬처는 라이프 스타일 전반으로 확장하는 추세다. 음악, 영화, 드라마 등 콘텐츠는 물론 전통문화와 패션, 리빙 브랜드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가 그 창작 에너지의 저변을 탐색하고 향후 시장 내 위상을 설정하려는 글로벌 플랫폼의 포지셔닝 행보로 평가되는 이유다.

디자인마이애미의 서울행에는 이러한 시장 분석 외에 또 하나의 운명적인 서사가 존재한다. 바로 전시 공간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다. 젠 로버츠(Jen Roberts) CEO는 2005년 디자인마이애미가 출범하여 첫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한 인물이 바로 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라고 밝히며 디자인마이애미와 서울의 인연을 강조했다. 20주년을 맞는 해에 그의 상징적인 건축물에서 아시아 첫발을 내딛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디자인마이애미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이정표라는 것. 유려한 곡선의 비정형 건축물 DDP는 그 자체로 가장 거대한 전시품이 되어, 한국 디자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완벽한 배경으로 기능했다.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25) 전경. 사진: 김일다

전시를 기획한 조혜영 큐레이터는 한국어 ‘조명(照明)’에서 영감을 받은 주제 ‘창작의 빛’에 두 개의 의미를 담았다. 첫째는 이미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작가를 스포트라이트처럼 ‘조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보편적 조형 언어를 구사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조혜영은 “국제 기준에서 우리 수준을 점검”하는 것의 중요성을 밝히면서 글로벌 플랫폼의 역할을 강조했다. “가구 디자이너 최병훈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인 갤러리 프리드먼벤다에 소속돼 후대의 길을 열었다. 그 뒤를 이어 이헌정은 알&컴퍼니, 박원민은 카펜터스워크숍갤러리에 각각 소속돼 활동 중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행사가 젊은 디자인씬에 영감과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디자이너가 국제 무대에서 조명받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국내 시장만으로는 그들의 성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창작의 빛>전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 디자인은 이미 세계와 소통하는 언어를 지니고 있다.” 전시는 분명 그 자신감의 근거를 명확히 보여준다. 출품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지역에서 세계로’, ‘물성의 재발견’, ‘자연과 보존’. 이 네 흐름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겹치며 한국의 ‘멋’을 직조한다.

첫 번째 ‘과거와 현재의 대화’. 전통을 동시대 언어로 번역하는 감각은 한국 디자인을 규정하는 핵심적 미학 가운데 하나다. 전시에는 자연과 인공, 전통 기법과 산업 기술, 한국적 미감과 현대 조형성이 교차하는 다양한 실험이 전개됐다. 한국 아트퍼니처의 선구자 최병훈(프리드먼벤다)은 거친 자연석과 매끈하게 정제된 목재를 결합한 <Afterimage of Beginning> 시리즈로 동양적 사유와 미니멀한 조형미를 선보인다. 원초성과 인공성이 빚어내는 긴장과 조화를 동시에 드러냈다. 도예가 김동준(갤러리LVS&크래프트)은 전통 장작 가마로 도자를 굽는 ‘슬로우 크래프트’ 방식을 고수해 왔다. 가마 불의 열기를 고스란히 품은 달항아리로 기계가 재현할 수 없는 시간과 우연의 미학을 담아냈다. 가죽 공예가 유다현(드바로운)은 조선시대 볏짚 민속 공예 기법을 가죽에 적용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대칭 구조를 띤 가죽 케이스 <Harmony> 시리즈로 질긴 물성과 유연한 감성을 아울렀다.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25) 전경. 사진: WeCAP

전통, 로컬, 자연을 잇는 대화

다음은 ‘글로컬라이제이션’의 관점에서 전시를 살핀다. 큐레이터가 강조했듯, 한국 작가들은 지역적 정체성을 발판 삼아 세계 디자인계의 주요 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박원민(카펜터즈워크숍갤러리)은 자연의 원초성과 기계적 인공성이 교차하는 조형 언어로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아 왔다. <Stone & Steel>은 화강암과 가공한 철판을 결합해 인간과 비인간의 세계를 연결했다. 이광호(살롱94디자인)는 몬트리올 커미세어에서 열린 개인전(2008)과 펜디가 밀라노에서 진행한 <크래프트 펑크>전을 계기로 글로벌 컬렉터 사이에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Copper Enamel Chair>에는 구리의 자연 산화로 생긴 패티나(patina)를 활용해 그 불규칙한 패턴을 비정형의 미학으로 승화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김민재(마르타)는 ‘예술가의 은거’라는 콘셉트를 바탕으로 창신작을 발표했다. 특히 <Ruffled Chair>는 흔히 ‘감독 의자’로 알려진 접이식 의자에 벨벳과 레진을 더해, 권위적인 재료와 일상적인 물성을 뒤섞는 위트를 드러냈다.

세 번째 키워드는 ‘물성의 재발견’이다.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되고 대량 생산된 제품이 넘쳐나는 시대에, 디자이너들은 물질 자체의 촉감, 역사, 그리고 가공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연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디자인에서 재료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의 서사, 개념을 이끄는 주체로 나아간다. 2022년 로에베 공예상 대상을 수상했던 정다혜(솔루나파인크래프트)는 말총을 엮어 기물을 만든다. <A Time of Sincerity>는 조선시대 갓 공예에 쓰이던 전통 재료와 기법으로 만든 바구니다. 질긴 말총을 부드럽고 투명한 구조체로 전환해 전통공예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했다. 박종진(J.로만갤러리)은 이질적인 재료를 결합해 조각적 도자를 제작해 왔다. <Blue Patchwork I>에는 종이 타월에 도자 유약을 입힌 뒤 최대 1,000장까지 겹쳐 쌓아 올려 밀푀유 같은 구조를 구현했다. 다채롭고 놀라운 질감을 자아내는 이 혁신적 기법은 작가가 수백 년 전통의 달항아리 제작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것이다. 달항아리 제작에서 층을 쌓아 올리는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변주해 조형적 볼륨을 구현했다. 오세정(살롱94디자인)은 버려진 사물을 조합해 업사이클링 가구를 만들어왔다. 그의 대표 연작 <Salvage>는 플라스틱 의자, 장난감 등 기성품을 뼈대로 삼아 그 위를 가죽으로 감쌌다. 과잉된 소비문화를 성찰하는 동시에, 폐기물에 새로운 조형적 가치와 서사를 부여했다.

마지막은 ‘자연과 보존’을 키워드로 출품작을 돌아본다. 지속 가능성은 디자인은 물론 사회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 되었다.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을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친환경 담론과도 맞닿아 있다. 이정인(찰스버넌드갤러리)은 지속 가능성이란 화두를 전통공예의 맥락에서 풀어낸다. 작가는 출산을 계기로 환경 문제를 더욱 의식하게 되면서 전통 사회의 지혜에 주목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뽕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를 옛 창살에 붙이던 기법을 응용해 의자를 제작했다. 김경희는 옷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으로 포장이나 덮개를 만들던 보자기 전통을 실크 오간자라는 현대적 재료로 번안했다. 자투리 천 한 쪽마저 소중히 여겼던 보자기 정신, 즉 절제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다. 목공예가 김민욱은 나무의 결, 갈라짐, 옹이 등 재료 본연의 특징을 그대로 수용한다. 의도적으로 형태를 가공하기보다 재료가 지닌 서사를 섬세하게 읽어내고, 그 생명력을 이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디자인마이애미 인 시추’의 서울 개최는 한국이 글로벌 컬렉터블 디자인 시장의 신진 플레이어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프리즈 서울과 같은 시기에 열리면서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대아트씬의 흐름을 보여준 점도 의미가 크다. 미술품 컬렉터가 자연스럽게 디자인작품으로 시선을 확장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차세대 디자이너에게는 세계 무대로 향하는 비전을, 국내 컬렉터에게는 새로운 예술투자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첫 개최지로 한국이 선택된 사실은 고무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바깥에서 한국 디자인의 지형도가 그려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한국성’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된 이미지만 소비되거나, 국내 담론의 부재 속에서 해외 시장과 컬렉터의 취향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 한국 디자인계가 자생적인 담론과 시장 기반을 다져, 해외와의 교류 무대를 꾸준히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DDP에서 쏘아 올린 ‘창작의 빛’은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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