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의 없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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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쟁이 허무하게 되는 때가 있다. 결론이 허무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논쟁 자체가 허무해지는. 그것은 짐짓 이해와 배려의 화신인 양 나타나서 모두를 이해하고 배려하라 하면서 논쟁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화신 중에 최근에 가장 모습을 많이 나타내는 것은 ‘개취’나 ‘취존’이라는 어법일 것이다. 정치를 논쟁하는 자리에서도 ‘취존’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언짢곤 했다. 모두가 선택을 가졌음으로 우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써 이 말은 위계와 지배, 정당성을 자처하는 무언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자유와 그것으로 비롯된 선택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런 옹호에는 과잉된 실존적 사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실존주의를 믿어도 될까. 그렇게 이 글은 시작한다.

2
어느 날 카뮈에게 누군가 “당신은 왜 살아갑니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답했다. “삶은 그저 습관” 사르트르에게도 비슷한 질문이 던져진 적 있다. 그리고 그는 삶이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답했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둘은 삶에 대한 분명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답은 실존주의가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존주의를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홀로 남겨짐(délaissement) 다음의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l’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것. 앞 선 물음의 카뮈의 답은 홀로 남겨짐을 의미하고, 사르트르의 답은 실존이 본질에 우선함을 의미했다.

반면에 두 거장의 공통점은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소설’이라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소설’은 논문과 이론서보다 훨씬 덜 개념적이지만, 어느 것보다 실존주의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데에는 탁월하다. 그것은 오히려 실존주의가 삶 혹은 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 ‘방법론’이기 보다는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것에 가까운, 일종의 ‘태도론’이기에, 개념과 성질을 드러내는 글보다는 한 사람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더 좋은 설명일 것이라고 둘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방인(L’Étranger)
『이방인』 안에서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은 ‘당위’이다. 그의 세계에는 ‘전통’과 ‘윤리’ 그리고 ‘종교’라는 당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당위를 세계의 본질에 닿아있다거나, 무조건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있는 근거들이 마련된 당연한 것들이 아니라, 습관(관습)적인 것들에 불과하다고 반응한다. 어떠한 가치를 수행하기 위해서 ‘당위’가 마련됐다고 여겨지는 세계에서, 그는 그것이 그저 습관적으로 실천되어져 왔기 때문에 ‘가치’를 담보하는 ‘당위’처럼 보일 뿐이라고 세계를 전복시킨다. 그래서 습관이란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단지 스스로는 스스로만의 행동 양식과 선택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또한 추구해야하는 목적들이 정해져 있는 인간형이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 전통적 세계관과 단절한 즉흥적이고 도발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인간형 그리고 비윤리적 인간형-반윤리적이 아니다- 그것이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카뮈의 “삶은 그저 습관”이란 답은 인간이 당위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습관’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의 삶들을 가리킨다. 카뮈의 말을 따를 때, 윤리란 그것을 수행해야하는 까닭과 이유가 있다면 진정 옳은 것이 아니라는 칸트의 말은 윤리가 결국 습관일 뿐임을 고백할 뿐이고, 종교의 교리가 그것의 교리에서 근거지어진다면 아전인수에 다를 것 없는 또한 습관일 뿐이다. 그리고 이 습관들은 불현듯 세계에 가치가 되어 우리와 동일시 된다. 우리의 습관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습관을 따를 때 우리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유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의식하지 않은 채로 생각 없이 행위한다. 우리는 습관을 우연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구성하며, 습관은 우리를 다시 습관화-게다가 ‘당위화’-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습관과 동일시 되어있다. 그래서 결국 당위는 어쩌다 우연적으로 선택된 ‘습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부조리’이다. 이것은 습관에 두 번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습관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났을 때, 우리는 홀로 남겨짐(délaissement)에 놓이게 된다.-마치 뫼르소가 그랬듯이-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뮈의 다른 소설 『시시포스의 신화』를 읽어야한다.

시시포스의 신화(Le Mythe de Sisyphe)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뫼르소와는 달리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시시포스를 묘사한다. 죽음이 싫어서 신들에게 구라를 치곤 오래 살아남았다가 지옥으로 간 시시포스는 죽음 이후에도 벌을 받는다. 언덕으로 돌을 굴려 올리는 벌이다. 언덕 위로 오른 돌은 다시 아래로 구르고 떨어진다. 그는 다시 돌을 굴려 언덕의 정상까지 올려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시시포스를 세운 채 카뮈는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시시포스가 돌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 후에, 빈 몸으로 언덕을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마치 습관처럼, 더이상 신이 그를 여전히 감시하는지, 형벌이 끝났는지, 자신이 벌을 받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한 물음도 생각도 없이 자기와 동일시 된 돌, 그 돌에서 해방된다면 시시포스는 무엇을 할까. 카뮈가 관심을 가진 것은 시시포스의 딱한 숙명이 아니라 숙명을 벗어난 상태였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 답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물음이 밖에 있는 답을 발견하기 위한 퀴즈가 아닌, 스스로를 ‘성찰’로 내모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시포스의 빈 몸, 그때에 그는 성찰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돌과 자신은 결코 동일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런 결론이 미칠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는 참아내야 한다. 뫼르소의 세계처럼 인간은 습관 속에 살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습관에 대한 의혹과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 순간이 온다.-시험을 망친 아이가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고, 입시제도를 증오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또 폭력적인 노동조건에 자신의 능력과 싸우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사장과 싸우기로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싸우기로 결심한 것처럼- 그리고 그때의 인간은 우울해진다.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기도하고, 속은 골병에 시든다. 그러면 거기에 빠져들어 자살을 하는 이도 있다. 자살은 부조리한 숙명에대한 탈주로 부조리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스스로의 생명을 제거하는 자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세계란 습관과 동일시된 스스로를 죽이는 것, 즉 ‘이방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되는 것이 우리 안에 놓여진 홀로 남겨짐(délaissement)이다.

카뮈는 “삶은 그저 습관”이라고 답했다. 이 답은 삶이란 습관으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을 ‘홀로 남겨짐’이란 성찰의 계기에 놓이게 한다. 부조리를 목도한 인간은 노예가 아닌한 성찰의 문턱으로 들어가야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성찰을 지나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 대답은 카뮈에게도 마련되있지만 사르트르의 답과 만날 때 더 극명해진다. 이제 바통을 잇자면 사르트르는 홀로 남겨졌으니 ‘C를 할 때다’라고 답할 차례이다.

구토
사르트르의 『구토』는 소설의 주인공 로캉탱의 다음과 같은 독백 한 구절에 닿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물체들,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용하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그것들은 유용하지만 오직 그뿐이다. 그것들이 나를 만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쥐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역겨움, 구토였다.”

당위를 습관이라 읽었을 때, 부조리한 세계를 발견하고 인간이 빈 몸에 들어설 수 있는 이유는 습관과 인간이 동일시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를 사르트르의 문법으로 얘기했을 때 동일시는 ‘규정’이다. 다시 말해, 습관들은 우리를 규정한다. 습관은 카뮈가 주체의 행위에 주목해 부르는 이름이지만, 반대로 사르트르는 ‘습관을 하는(갖는)’ 존재에 주목해 ‘규정’이란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습관에서 벗어나 빈 몸이 되듯이 습관이 인간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 분명히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존재하며, 마치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이 부조리를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숙명에 놓여있다. 그러나 시시포스가 바위에 거리를 두었을 때처럼, 우리가 빈 몸-홀로 남겨짐-으로 성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당위란 부조리였음을 즉, 본질이 아니었음을 또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본질의 정의는 그것에 어떻게 시선을 던지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실존주의에서 본질이란 존재의 목적∙이유에 해당하는 존재가 그러한 까닭을 뜻하는 본래성이다. 그리고 그 본질이란 사물에만 정해져있는 것이다. 볼펜을 예로 들자면, 볼펜의 본질은 이미 규정되어 있다. 볼펜은 이미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라는 본질이 결정된 다음 생산된다. 즉 볼펜은 본질이 정해진 다음에 존재가 생겨난다. 그것이 볼펜이 되었든 젓가락이 되었든 양초가 되었든 사물은 본질이 정해진 다음에 존재가 생겨난다.

종교론자들은-그리고 습관 속의 인간들은- 인간 역시 본질이 정해진 다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됐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이미 신이 정해 놓았다는 논리다.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본질에-그리고 습관에-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성찰 없이 ‘당위’란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인간은 사물과는 그 어떤 목적도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은채 존재한다. 그리고 한 인간을 그가 소유한 무언가의 내역을 낱낱이 서술하는 것으로 표현한대도 그를 전부 그렸다 할 수 없으며, 그가 일순간 변화하여 그 내역과 다른 것을 소유하거나, 비소유한다고 해도 그 한 인간은 온전히 그이다. 인간은 그가 지금 무엇이라고 할 때 조차 바로 그 무엇과 일치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에서 벗어난 존재하기’인 실존하는 존재다. 실존이란 결국, 그 무엇-본질이나 가치, 습관-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로캉탱의 역겨움은 물체들이 나를 만지는 즉, 세계가 본질이라 이름 붙이 ‘습관’들이 그리고 규정된 것들이 나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역겨움이다. 이 역겨움에서 로캉탱은 구토를 한다. 그리고 이제 사르트르는 성찰을 통해 본질은 없다라는 것을 깨달은 ‘홀로 남겨짐’이라는 빈 몸의 상태로, 규정을 제거하고 자유만 남은 세계의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가 무엇이 될 것인지 ‘선택’을 하라 요청한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대답과 카뮈의 대답은 이어진다. 삶은 그저 습관으로 가득 차있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C-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적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본질도 없는 아이러니한 존재이지만, 이렇게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피투(Geworfenheit, 被投: 내던져진)된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즉, 피투된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기투(projet, 企投: 스스로를 내던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C라는 대답은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실존주의의 대명제와 연결된다.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있지 않고-그것은 오히려 부조리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규정이 어떤 본질보다도 앞선다는 것이다.

6
그렇게 실존주의는 인간이 그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대하길 요구하는 철학이며 자유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1945년의 파시즘∙전체주의∙권위주의로부터 시대는 그것들이 질실시켰던 개별성과 특수성 그리고 자유를 소생시키는 자리에서 당위와 본질이 표상하는 ‘보편’이란 영역을 손쉽게 제거시켰다. 종교적 세계관이 해체되었고, 맹목적으로 추구했던 국가주의가 수명을 다해 우울하고도 고독스럽게 남겨진 자리에 실존주의는 개성과 자유를 옹호하는 충실한 이론적 버팀목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당시에 가치있는 일이었다. 어떤 대상에도 권위적인 위계를 거부할 수 있었으며, 예술은 후대에 예술의 예술이라 불릴만한 ‘미(beauty)’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하나의 세계를 표상하는 인민-정치적 주체-이란 이름보다는 각각의 관심과 이해(利害) 그리고 취미∙취향을 반영한 각각의 사회적 주체만이 남겨졌다. 그러나 당시에 시대가 ‘보편’을 손쉽게 제거했을 때 그것은 차라리 제거가 아니라 상실이란 단어가 어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편을 제거함이란 그것만으로 세계의 부분, 개별성, 특수성들을 마련하고 보존하지만, 어떤 대상도 옳고 그른지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윤리적 백치 상태로 이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충분한 의석 수를 가지고 민주사회에서 반대하는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며, 끝까지 토론하고 설득하기로 그것을 존치하기로한 참여정부는 끝까지 대의민주주의인척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결정은 결국 옳고 그름은 정치와는 관계 없다는 윤리적 백치 상태를 증명한다. 박원순 시장의 동성애 차별 금지를 선언하는 인권헌장이 반대 여론에 폐기될 때에도 그러했고 “국민의 절반이 반대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갖갖이 정치적 사건들이 모두 그러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모두 보편이 매개되어있을 때만 오로지 가능하다,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부분과 부분, 개별과 개별, 특수와 특수로 이뤄진 자리에서는 보편적 가치를 표상하는 모든 권리-심지어 인권일지라도-는 언제나 유보될 가능성이 잠재된다. 왜냐하면 보편과 옳음은 1789년의 로베스피에르가 그랬던 것처럼, 1863년의 링컨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근거도 토론도 필요조건으로 하지 않은 채 완성되어 선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수성을 보존한 자리가 아니라 특수성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그냥 보편적인 것이라 우기고 떼를 쓰는 채로.

다른 한편의 문제는 개별성과 특수성 등의 보존이 진실한 의미에서의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단락에서 취존이란 단어를 썼듯이 ‘취존’은 개인이 가진 개별성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뉘앙스를 갖고있지만 그것이 쓰일 때는 오히려 배제와 같이 이해의 거부를 둔갑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해란 해석학적으로 공통-보편이라고 할 만한-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개별과 특수만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이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내 취향이니까 존중해줘”라는 말과 “취존할께”라는 말은 그 개별성을 따지고 이해하려는 것보단 그냥 내비두는 방치에 가깝다. 동성애를 이해하는 일은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이 하는 보편적인 사랑의 개념과 어긋나지 않음을 전제할 때 비로소 온전히 가능한 것이지 특수한 종의 인간의 특수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적 인식에서 우리는 개별자들이 존재한다고 여길 수 있을 뿐이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실존주의는 결국엔 “세계” 자체를 지워버린다. 실존주의가 겨냥한 세계는 습관과 부조리, 규정들의 세계였지만 그것에 벗어난 실존적 주체에게 그 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지극히 자유로운 개별자들만이 개별적으로 남는다. 그 어느 개념들을 동원한들 하나의 그림으로 세계를 포착할 수도,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어져 버린다. 과거에 우리가 세계를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참극의 근원을 그 세계에서 찾고 비판으로 바꾸려고 했던 실천들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계를 바꾸려면?”이라는 물음이 “세계”가 없어 불가능해져 버린다. 각각의 개별자들이 표상하는 세계 혹은 없는(無) 세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현대에는 XX사회론이 범람한다. 그러나 그들은 개별자의 주관적인 일부의 세계만을 표상할 뿐, 윤리적 백치상태도 이해 없음의 문제도 완벽하게 해소하지 못한다.

7
결국에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은 보편을 재생시키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실존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한 부분은 실존주의만이 배양시킨 문제라기 보다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보존하려고 했던-특히 포스트모던의- 모든 이론과 사조가 왜곡되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에서 카뮈와 사르트르의 생각을 따라갔었던 것처럼 보편의 이름으로 창궐했던 광기의 폐허에서 그들의 생각은 광기를 경계하는데 가치있던 일이었다. 문제는 그 경계와 견제를 위해 너무 멀찍이 떨어졌다는 것이지.

그러니 세계를 만드는 일로서, 또 보편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로서 대문자로 쓴 정치의 이중성을 우리는 다시 직시해야한다. 그것은 이유도 없이 보편을 내세워 선언하기 때문에 “선”을 창설할 수도 “악”을 창설할 수도 있다. 그것이 정치의 이중성이다. 그러나 보편이 악이 될 수 있다면 그에 반격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은 단 한가지다. 그것은 자유이다. 이때의 자유란 어떠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기보다, 어떤 것이 보편인지 가치가 될 수 있는지 또 옳은지를 판별하며 논쟁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실존주의적 사유를 경유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실존주의만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악을 판별할 수도, 세계를 바꾸자고도 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애초에 실존주의가 놓일 자리 조차 없을 것이다. / 조재연

*참조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이방인》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시지프 신화》
– 장 폴 사르트르, 방곤 역,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서동진,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변증법의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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