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환해지는 순간_류주영: Dear Summer,

류주영 개인전 《Dear Summer》(10. 27~11. 18 아트사이드갤러리) 전시 포스터

1
낡은 달이 수풀에 던지는 열네 번 무감한 입맞춤. 그리고 문득 가장 구체적인 어둠이 온다. 술과 피 섞인 그늘에 잠겨있던 초록 사포는 서로를 찌르면서 자라났다. 죽은 핏줄의 흰 목을 마지막으로 만질 때처럼 서걱거리는 결과 질감은 시간에 비추어 봤을 때 수상한 기색이 없다. 모든 이들이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으므로 닫힌 대지처럼 굳게 입을 다물어야 할 때. 하지만 허기에도 낮이 처방해 준 수면제를 한 번도 먹지 않은 입술은 이내 피어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니 희망은 외로운 것이고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나는, 어둠을 절망의 권리로 허락하지 않는 작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했다. “가장 우울하고 암울한 시간 속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은 세상이 참으로 상냥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삶은 때로는 힘들고 슬프고 우울하다는 것’을 상냥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저 세상이 상냥하다고 했더라면 절망의 권리로 항변했을 텐데, 절망을 건네는 온유함 그래서 그것으로 희망을 길어 올리는 것이라면 도무지 저버릴 길이 없다. 희망에 관한 표현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를 따를 때, 삶의 참혹함을 외면하고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는 작품은 희망을 건네기보단 희망을 세상에서 유리시킨다. 그것은 미美란 현실이 아닌 화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각인시킨다. 희망이라는 표현만 있을 뿐 어디에도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은 고통의 전이轉移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절망에 몰입하려는 미학 역시 ‘예술은 상상의 허구’라는 명제에 발목을 잡힌다. 삶의 고통에 절여진 우리는 화면의 참혹함을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전자가 그랬듯 그를 가상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한정시킨다. 정직한 절망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기묘한 향락이 된다. 우리는 허황된 희망과도 즐거운 절망과도 싸워야 한다. 류주영이 삶이 ‘힘들고 슬프고 우울하다’고 세 번이나 절망하면서도 그것을 ‘상냥함’으로 묶는 건 그런 까닭일 것이다. 여기선 누구도 절망하되 ‘완전히’ 절망할 수 없다. 진정으로 희망을 지켜내는 일이란 그로써 가능해진다.

류주영 ⟨Visibility of Minde⟩ 캔버스에 아크릴릭 112×194cm 2023

2
수면과 각성은 얼핏 모순으로 보이지만, 잠을 자지 않는 자는 깨어있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를 구성한다. 각성은 항상 눈을 뜨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깨어있음이 ‘깨어남’을 그 본질로 하는 까닭이다. ‘깨어남’이라는 사태는 오직 잠을 자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항상 깨어있으면 진정으로 깨어날 수 없다. 이를 절망과 희망이라는 짝에다가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절망이라는 긴 잠에 빠진다 하더라도 그 잠 때문에 누군가는 희망을 처음인 것처럼 확실하게 경험한다고. 류주영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소녀는 아마 그런 밤을 지나 새벽에 도착한 것일 테다. 화면에서 소녀는 늘 자리옷의 차림으로 숲에 나와 있다. 수중엔 야심한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야경을 향해 걸음하게 만드는 절망이 존재하지만, 이 절망은 소녀를 희망과 마주 보게 만드는 새벽으로 한 번 더 밀어낸다. 몸을 누일 때 그에게 자리한 것은 어김없이 밤이 왔으며, 오늘의 절망을 잠 안에서 속수무책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새벽은 달리 말한다. 어김없이 아침은 올 것이고, 어제의 절망은 결국 빛을 도리없이 토해낼 것이라고.

모든 것을 삼키는 술과 피 섞인 그늘. 그러나 그곳에서 소녀는 보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보게 된다. 이 여정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빛 하나 없는 새벽, 숲에 간 적이 있다. 무서울 것이라 여겼는데 숲은 다정했다.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동물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미약하게 새소리도 하나둘 들려왔다. 해는 없으나 잎은 바짝 서있었고 실루엣 사이로 분주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 느낄 수 있었다.” 물기 하나 느껴지지 않고 사포 같이 서걱이는 표면은, 얼핏 희망이 모조리 메마른 처지를 은유하는 것처럼 드러난다. 누구 하나 어깨를 짚지도 손을 잡아주지도 않는 ‘홀로움’ 역시 절망에 기워진 고독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류주영이 이러한 질감으로 이룩하는 것은 낮의 볕이 밝히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들이다. 태양 앞에서 사물은 통일된 표면으로, 어떤 부분도 허락하지 않는 매끈한 윤곽으로 감각된다. 오직 대상을 전체로만 간주하는 정오의 세계에선 중대한 것이 아니라면 현전에서 탈각시키는 압제가 있고, 드러난 것이 아니라면 인식에서 제외되는 소외가 암약한다.

류주영 ⟨붉은 정원2⟩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0cm 2023

류주영이 느낀 ‘분주한 에너지’란 이런 것일 테다. 새벽의 가난한 빛은 표면을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고 부분마다 그림자를 남겨놓는다. 촘촘한 가루 하나하나를 느껴야 하는 연마지처럼 거친 표면은 저마다 약동하는 낱 낯의 표현이다. 볕 아래였다면 꽃 한 송이가 피어있을 장면이 여기에선 줄기를 이루는 수만 개의 부분, 잎을 이루는 수만 개의 부분, 꽃 머리를 이루는 수만 개의 부분 등 차마 셈할 수 없는 홀로움으로 나선다. 면은 선으로, 선은 점으로 향해가는 무한한 분할. 닫힌 것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던 대지는 이제 가장 시끄러운 처소다. 지금 고독과 적막은 모두 낮고 작은 것들을 위해 있다. 애틋한 별빛과 소곤거리는 새. 풀벌레의 울음은 이곳이 아니라면 감각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림은 자꾸만 심연을 뒤지게 만든다. 시선은 숲의 광활함이나 장대함보다 저마다 방향을 따로이 지닌 풀의 흔들림, 그리고 그 진동 사이사이 힐끗 몸을 드러내는 작은 움직임을 향해 미끄러진다. 그러니까 이 시간은 어떤 부재에도 알리바이를 대지 못한다. 보이는 것을 제외한 모두는 새벽을 말미암아 존재한다.

고독을 동행으로 변모시키는 난립, 적막을 디딘 소요 그렇게 비로소 절망은 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이 있으니까 희망도 있다는 것, 절망의 순간에 희망의 실마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진부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어른의 생각일 뿐이다. 소녀가 매혹적인 이유는 그런 진부함에 ‘이상’을 팔아넘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희망을 비롯해 사랑과 우정, 평화 등으로 요약되는 주제가 더 이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이상을 덧없다고 느낄 만큼 황폐해진 까닭이다.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체다. 소녀에게 진부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뜨고 지는 해, 낮에 깨어있다가 밤과 함께 잠들어야 하는 규칙, 같은 곳을 들락날락하는 일상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반복되지 않는가. 류주영은 소녀를 일정한 생물학적 시기로 규정하기보단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이라고 덧붙였다. 이상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상이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순수가 없어선 안 된다.

류주영 ⟨What to let you have⟩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97cm 2023

무엇보다 류주영의 그림이 진부함에 희생되지 않는 이유는 앞서 강조했듯 그가 절망과 싸울 뿐 아니라 희망과도 싸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녀의 눈이 경탄스러운 풍경으로 가득 차지 않은 채 흐리고 텅 비어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보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동시에 보이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에 동공은 그 어느 것도 밖으로 비추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보이는 것’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절망의 포기 또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녀가 여기서 희망을 보는 이유는 긴 잠에서 절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절망의 시간 동안 어쩌면 소녀는 그것의 달콤함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마음껏 다 놓아버릴 수 있을 텐데, 희망이 있어 그런 안식이 가로막힌다 불행. 그것이 희망의 발견에도 표정이 마냥 기쁨으로 물들지 않도록 만든다. 희망의 쾌락이 아니라 희망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 그때서야 희망은 겨우, 오롯이 지켜진다.

3
끝에서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강박이다. 우리는 찢어짐과 죽음을 겪는 순간 떠오른 생의 욕망을 희망으로 읽는 시늉을 할 뿐이거나, 우리의 포기가 불이익이 될 어떤 배후에 의해 희망에 휘말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류주영의 그림을 보곤 그 강박에 질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행복’을 표현하지 않는 류주영은 특별하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꿈을 꾸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절망을 모르는 자가 아닌 희망에 낯선 이가 발견하는 희망, 그 가뭇없고 속절없는 어둠에서 길어 올린 빛은 스스로가 가진 절망의 권리를 의심케 만든다. 진정으로 절망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며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 새벽은 다시 진부한 낮을 만들어 참혹한 밤을 초대할 테고, 소녀는 결국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류주영은 도리어 행복을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외려 ‘슬퍼할 일’이 남았다는 명분으로 희망을 건넨다. 누구도 완전히 절망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꺼이. 희망에 관한 표현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

류주영 ⟨Moments Unseen⟩ 캔버스에 아크릴릭 227×362cm 2023

참조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 pp. 357~358.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18, pp.225~232.
———, 『인생의 역사』, 난다, 2022, pp.75~82, 133~140, 231~239.
진은영, 「불안의 형태」,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pp.58~59.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pp.42~44.

■ 류주영 《Dear Summer,》 도록에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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