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편지를 받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과 “사고”의 관계는 그 대상의 스케일에 따라 차이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주체가 받아드리는 태도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이 둘을 나누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먼저 사고는 주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사고라는 대상이 발생하기 전으로 회기하기를 요청한다. 주체는 대상이 발생하기 전의 주변의 상태와 그것에 영향을 받기 전의 스스로에 갈증을 느끼며 갈망한다. 주체는 사고가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꾸길 원하지 않으며 그에게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을 무언가다. 반면 사건의 주체는 정반대의 태도를 갖는다. 주체에게 사건은 그것이 좋든 싫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게 복구란 의미 없는 것이며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제 주체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실천으로 변화를 매개한다.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는 이러한 사건과 사고를 매끄럽게 나눈다.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든지 어느 한 주체의 분주한 움직임이 스스로의 세계를 사고 이전으로 복구시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른 세계를 사건의 시점부터 그리려고 하는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그러니 구체적인 작품 언급과 그것에 필요한 근거를 나열하는 일은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대개 영화는 사건을 취급하는 법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사고의 사건화를 주요한 내러티브로 갖는다. 그리고 주체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과 마주하고 그것을 성찰과 반성 그리고 강인함으로 이겨내어 환희로 끝나는 모습은 대부분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가지의 물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환희 속에 엔딩을 맞이할 때 그를 붙잡아 만약 당신이 지금 성취한 것과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없었던 일로 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느냐고. 그 선택에 정답을 결론지을 순 없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주저”할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사건과 고군분투하면서 수많은 분실물들이 있었을테고 포기한 것 그리고 피로들이 존재할테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감독도 영화도 드물다. 환희 속에 주체는 항상 행복해야 감동을 선사하고, 성찰과 반성의 주체가 후회 따윌 하면 영화의 결론이 흐지부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언제나 주저 없이 사건 후의 모습에 당당하지만 때때로 자주 그 모습은 인간적이지 않기도하며 심지어 사이코패스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댄 포겔만(Dan Fogelman)의 <대니 콜린스(Danny Collins)>는 이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 영화다.
데니 콜린스(알 파치노)에게 가장 큰 사건은 이미 종료된 듯 보인다. 그는 무명 시절 매거진 인터뷰에서 말했었다. 성공이 가져다주는 부와 명예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킬까 두렵다고. 그리고서 그에게 ‘성공’이란 사건은 일어났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콘서트홀에서 모두가 떼창하는 유행가를 세계 어느 곳에서 부를 수 있고, 그의 차고에는 색깔별로 벤츠가 주차되어있으며 게다가 40살 연하 금발의 애인도 있다. 그런데 그의 생일에 40년 전에 그에게 이미 보내졌어야 했던 분실된 한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의 발신자는 그에게 가장 영감을 불어넣었던 존 레논이며, 존 레논은 그 안에서 전한다. 매거진의 인터뷰 속의 염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성공은 누군가를 쉽게 바꾸는 것이 못되며 오직 그것은 당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그리고 데니 콜린스는 스스로에게 물음한다. “그때 편지를 받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성공하지 못할까봐 30년을 넘게 자작곡을 쓰지 않았고, 성공했기에 (전)부인과 아들을 버렸던, 성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한 그는 이제는 반대로 그 모든 것을 위해 성공을 포기하고 스스로와 주변을 40년 전으로 되돌리려한다.
대니 콜린스에게 존 레논의 편지는 사건 후에 환희 속 엔딩에서 던지는 물음이다. 과연 그가 사건과 분투하면서 잃은 것은 있는지 그는 물음 받는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것이 사건의 대상화다. 그리고 그가 잃은 것을 찾고자 곡을 다시 쓰고, 월드 투어와 콘서트를 중지하는 대신 작은 바에서 공연을 하고, 30년을 넘게 연락하지 않은 아들을 찾는 것은 사건을 사고화시키려는 발버둥이다. 그러나 사건은 서두에서 운을 땐 것처럼 사고가 될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다. 곡은 써지지 않고, 작은 바에서의 공연의 관객은 한결같이 그가 쓴 곡을 원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정상화 시키고 싶은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그의 부가 필요하다. 여기서 그는 사건의 사고화를 주저하며 사건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의미화하는 방식으로 성찰하고 수용한다. 사건 후의 공간에서 모든 것이 다 빛나진 않지만, 그 공간 아래 빛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서 가진 것이 많은 자가 그것과 멀어지는 길로 내딛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적일 수 있지만 그렇기만 하다면 영화는 그저 흐뭇한 가족 영화가 됐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 모습에서 두제곱해 뒤로 물러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마치 변증법처럼 성공이란 시각에서 그것들을 포기하는 모습으로 성공(사건)을 성찰과 해석의 대상으로 만든 뒤, 성공을 버리려는(사건을 사고화하려는) 모습을 다시 대상화한다. 그러나 사건을 사고화시키려고 할 때조차 주체는 또다시 잃어버리는 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는 주저한 뒤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재의미화한다. 댄 포겔만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건”의 환희 후의 “주저”를 정확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주저함을 통해서 그 동안의 영화 속에서 감춰졌었던 사건의 민낯을 드러낸다.
사건과 사고의 사이의 “주저함”은 어쩌면 사건과 사고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건과 사고를 단순히 “되돌려야 하는”과 “되돌릴 수 없는”으로 나누려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두 서술어 앞에는 모두 “주체”라는 주어를 채택해야만 한다. 주체를 매개해야만 사건과 사고는 결정될 수 있으며, 그것이 주저함을 경유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세계를 변화가능한 것으로 규정하고 달음질을 하든, 필연적인 것이므로 유지나 복구를 지향하는 것이든 모두 주저하는 주체에게 달린 일이다. 그래서 매우 상투적인 것을 알지만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대니 콜린스의 실제 존 레논의 편지의 대목처럼. “Only you can do that. So What do you think about that Danny Collins?” 당신의 사건과 사고의 건투를 빈다. / 조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