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초상, 솜꽃 핀 새벽_강강훈 개인전

◼︎ 『아트인컬처』 2025년 7월호

강강훈 개인전(5. 16~7. 13 조현화랑 서울) 전경

한국 하이퍼리얼리즘 2세대 강강훈. 작가는 초상화에 바니타스적 요소를 결합해 감정, 기억, 정체성 등 인간의 내면을 탐색해 왔다. 그의 개인전(5. 16~7. 13)이 조현화랑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메타포’를 주제로 삼은 신작 8점을 선보였다.

강강훈 회화에서 딸이 중심 모티프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2016년. 이전에는 작가 자신이나 유명인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현대인의 다면을 투영한 <Modern Boy> 시리즈가 주를 이뤘다. 그랬던 작가가 돌연 딸을 그리게 된 계기는 인물의 외면은 물론, 내면을 재현하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인물 자체보다는 그 옆에 있는 무언가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극사실주의는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표현이 본질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관이 없다는 시선은 오해다. ‘사실’은 언제나 재구성된 현실이다. “우리는 세상을 특정한 ‘관점’에서 본다. 회화는 대상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를 넘어 무엇을 가치 있는 대상으로 판단하느냐가 중요하다.” 강강훈은 이 리얼리티를 인간을 담아내는 통로로 삼았다. 표현의 정교함으로 감정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새겼다. 정밀한 표면에서 내면을 일구는 메타포였다. 작가는 직접 촬영한 사진을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전문 모델의 연기는 디렉션이 수월하게 반영되지만, 딸은 다르다. 이제 중학생일 뿐인 자녀에겐 작업 개념에 이해가 필요하고, 아버지인 작가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하물며 딸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아이를 카메라 앞에 세우는 일은 물론 기르고, 달래며, 보듬는 생활이 내내 ‘작업’이었다.

강강훈 〈All things pass〉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2025

<All Things Pass>는 하루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문장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에서 가져왔다. 강강훈은 딸에게 삶의 초연함을 표현하도록 요청했다. 어른의 감정을 노래하는 아이의 모습에는 묘한 울림이 따른다. “아이가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 더 슬프게, 또 다르게 느껴진다.” 아직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 표정과 몸짓은 오히려 정서의 무게를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목화를 인간이라고 여기면서 그렸다”

강강훈 회화에 접근하는 또 다른 관점은 형식을 내면의 언어로 읽어내는 데 있다. 화면 곳곳 배치된 생략과 변주, 정제된 색채는 인물의 감정을 은유하는 장치다. <After Rain>에는 지나간 비를 암시하듯 인물과 목화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과거였다면 작가는 사진적 리얼리티를 제일의 목표로 두었을 테지만, 이번 작업엔 오히려 생략과 변주에 신경을 기울였다. 빛, 형태, 텍스처를 치밀하게 따라가기보다 오브제 일부를 뭉뚱그리거나 수정했다. “디테일을 덜어내고 붓질에 심상을 새겨 넣었다. 사실과 상상, 감정이 뒤엉킬수록 현실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다.” 작가는 비가 그친 후 남은 잔여물을 감정의 흔적으로 해석했다. 맺혀있으나 떨어지지 않고, 말라가지만 지워지지 않는 부재의 감각을 상기했다.

강강훈 〈Cotton〉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2025

목화는 작가의 주관적 사실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대상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상징하는 식물엔 애도와 그리움이 함께 서려있다. <Cotton>은 목화를 그린 정물화이지만, 그 과정과 태도는 초상과 다르지 않다. “목화를 인간이라고 여기면서 그렸다. 가지 끝에 매달린 솜은 때론 비를 머금기도, 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목화와 함께 있거나 솜옷을 입은 딸의 모습은 어머니와 손녀의 초상이기도 하다.” 꽃의 중심은 또렷하지만 가장자리로 갈수록 흐려진다. 형상이 아니라 기운과 분위기가 앞선다. 물리적 대상보다 감정의 잔상이 강하게 남는 구조다. 어머니의 부재, 따뜻했던 촉감, 손에 닿을 듯한 거리감을 은유하는 심상의 응결체다. 정물이라 부르기엔 추상적이고, 초상이라 하기엔 정물에 가까운 형상. 작가는 바로 그 모호함으로 더 선명하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지점은 화면을 지배하는 색채다. 회화의 바탕을 이루는 푸른빛은 정서의 기조이자 기억의 온도를 설정하는 장치다. 작가는 이 색조를 새벽에 비유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자주 새벽에 깨어 붓을 들었다. 내면을 새벽과 겹쳐 보았다. 어둠과 빛, 어제와 오늘, 애도와 망각 사이…. 어느 것도 결정되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지나가는 시간을 색에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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