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의 효력은 결산 후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나 모두가 결산이 마쳐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 않다고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함유한 피의 농도와 관계없이, 주권은 처음부터 국민에게 있다고 전해졌다. 신체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모두 처음부터 그곳엔 완고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헌법으로도 권력은 자유의 본질부터 부차적인 것까지 모두 다스릴 수 있었다. 거기에는 결산이 필요했다. 충분히 지불된 적 없었기에 발휘된 적 없던 시대의 효력은, 한 발의 총성과 한 움큼의 농성으로, 후불로써 처리되고 나서야 발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대가 곧바로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외려 두 개의 시대가 공존하기 시작한다. 영웅이 죄인으로 전락하는 일과 동시에 죄인의 추도식이 현충원에서 열리는 것은 그런 풍경이다. 여직 결산이 필요한 까닭이다. 결산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결산을 마치는 것은 예술의 일이다. 안동일의 ⟪오발탄⟫이 이미 낡아 바스락거리는 풍경을 현재의 시점으로 담음이란 그런 일인 줄 안다.
같은 공간을 밤과 낮으로 나누어 찍었기에 안동일의 사진엔 시차時差가 존재한다. 그러나 주야로 구분된 시차는 더욱 심원한 층위로 보는 이를 이끈다. 그것은 1970년대와 현재를 나누는 시대의 시차다. 이는 사진이, 풍경 이외에 중심으로서 피사체가 없는 것을 말미암는다. 사진의 타임라인은 의구심에 놓여 있다. 이 사진들은 스스로가 최근의 것임을 증명할만한 어떤 근거도 갖지 못한다. 그로써 사진은 70년대와 현재를 진동한다. 작업의 대상이 된 ‘서울어린이대공원’의 ‘어린이’란 낱말은 본디 70년대의 반공 교육을 성실히 이행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할 예비 군인이면서, 근면 성실하게 산업을 이끌 예비 근로자인 소년을 의미했다. 그것을 헤아리며, 당시는 지금과 달리 너무 폭력적인 것이라 적으려다 이내 고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 앞에서, 작업은 여전히 결산되지 않은 풍경을 기립시키며 섣부른 판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늘의 풍경은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 반공은 쇼비니즘으로, 개발독재는 시장만능주의로 몰골만을 바꾼 것은 아닐까. 같은 것임에도 주야의 조명으로 다른 것이 되듯이.
2
어떤 대상도 우위를 갖지 않은 채로 동등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상황. 그리고 위상적으로는 어떤 경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체됨 없이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위계 아닌 관계만을 지님으로써 실행되는 의미화. 예술이 곧 정치인 것은 아닐 테다. 예술과 연관된 실천이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는 일은 도통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정치가 무엇인지는—무엇을 결정해야하는지는— 알려준다. 그가 설정하는 ‘Installation-view’에 대한 설명이 올 오버All Over가 무엇인지 서술함과 동시에, 평등이 무엇인지를 가시화하는 인상은 여기서 나온다. ⟨Installation-view⟩ 연작의 표면은 균질하다. 그 어떤 것도 선명해짐으로써 중심이 되려 하지 않고 또 모호해짐으로써 배경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공간은 마땅히 피사체가 되어야 하는 것을 배치하였지만, 초점은 그것을 외면하고 모든 것에 동일한 관점을 건넨다. 어느 하나의 지위가 다른 모든 것들에 지위보다 더 고결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상태, 그리고 이 상태를 벗어나려는 어떤 요청도 외면되는 상황은 감히 서술로는 충분치 않은 평등의 개념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은 단순히 내재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작업은 보는 이조차 평등에 입회시킨다. 그리는 이라면 지나는 시간을 화폭에 고이 담아 놓고는, 보는 이의 시간은 마냥 흘러가도 모른 체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림은 보는 이를 독점한다. 그림을 보는 동안 그림에 입장한 이는 다른 무엇도 동시에 할 수 없다. 그러나 균질화된 ⟨Installation-view⟩들은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게 만든다. 푸른색 조상彫像이 푸른 잎들과 다르지 않고, 직선의 가로등이 곧게 선 고목과 다르지 않다. 양극단의 하늘과 땅은 어둠이 깔린 후에 구분되지 않는다. 이들은 전적으로 평등하다. 보는 이의 시선은 고정될 수 없어 수없이 미끄러지고, 비로소 작업에 독점적으로 메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외부에 무엇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작업에 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작업을 보면서도 스스로가 외부에 있다는 것을 매번 확인해야 한다. 보는 이는 이 외부, 즉 스스로가 놓인 시대를 의식함과 함께 작업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니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평등은 여전히 희귀한 것인가, 이제는 만연한 것인가. 이 둘 중에 작업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림 같지 않은 이 세상엔, 결산이 끝나지 않은 것이 있음이 틀림없다.
회전목마(Carrusel)가 발명된 것은 18세기로 추정되지만, 흑인 어린이가 회전목마에 최초로 앉게 된 것은 그것이 발명되고 나서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처음으로 회전목마에 올랐던 가장 처음의 흑인 어린이였던 샤론 랭글리는 1963년의 8월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말들은 여러 색깔과 모습을 지닌 채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색과는 관계없이 모두 함께 출발하고, 같은 속도로 회전하다가 동시에 멈춘다. 그들은 모두 다른 곳에 도착하지만, 여기선 누구도 먼저일 수 없으며 누구도 마지막일 수 없다. 회전목마 위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흑인 어린이가 목마 위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은 흑인 성인이 투표권을 가지는 것만큼 귀중한 일이었다. 이제 법령에는 가장 사적인 것에서 가장 공적인 것까지 평등이 모조리 기입된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외려 두 개의 풍경을 지니고 만다. 흑인은 투표장에 갈 수 있지만, 투표장이 아닌 곳에서 목숨을 위협받는다. 평등이 여전히 결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풍경은 현재에 귀속되어 있다. ⟨Carrusel⟩이 지칭하는 회전목마는 평등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매체다. 그러나 싸늘하게도 이 평등이 동시대의 공존하는 존재들 사이의 동등함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 평등은 지난 시대와 지금의 시대의 동등함 역시 가리킨다. ⟨Carrusel⟩는 시대별로 어린이에 관한 교육관이 담긴 상이한 문장들을 재생한다. 그리고 다른 문장들은 진정으로 달라지는 데 실패했다. 결산은 여직 마쳐지지 않았다.
‘국민교육헌장’에 따르면 68년의 어린이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었다. 그들은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해야 했었고, 국가는 그들의 삶의 길을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으로 규정했었다. 57년 제정되었고, 88년에 한 차례 개정을 거친 ‘어린이 헌장’엔 반공이나 애국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는 여전히 성인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한다. 이 헌장엔 어린이의 자유나 권리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대우를 수동적으로 ‘받아야’ 하는지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문장들을 동시대의 어린이가 읽는다. 어린이는 이제 반공과 애국을 배우진 않지만, 민족과 국가가 외부의 존재들과 얼마나 다른지 또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를 익힌다. 또 그들은 국가의 존망에 대한 사명을 강요받진 않지만, 기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염려를 재촉받는다. 집단에 대한 의식은 쇼비니즘과 자유시장주의로 변천했다. 동시대의 어린이는 한자에 익숙지 않아, 과거의 문장을 주저하며 읽는다. 그러니 그들이 이념을 서술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 아닌 신체에 기입된 이념을 실행하는데 주저함이 그같이 있을까. 그런 한에서 ⟨Carrusel⟩은 미결산된 것들에게서 발신된 독촉의 음성사서함이다.
3
서문에서 안동일은 전시와 동명의 영화인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언급한다. “한 가족 구성원들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와 전후의 궁핍한 사회상을 그려내 당시에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칭송받은 영화였지만 지금 세대들에겐 하나의 고전 영화일 뿐이다. ⟨오발탄⟩에 남겨진 이데올로기의 흔적은 마치 서울어린이대공원 기념비들의 낯선 풍경과 같다.” 이 문장의 “낯선 풍경”에 대해서 다시 헤아려 보려 한다. 공원의 기념비가 낯선 것은 그것이 ⟨Installation-view⟩에 담긴 것처럼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은 낡은 풍경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Carrusel⟩이 재생하고 있는 문장처럼 시대착오적인 의미를 담은 탓도 아니다. 그것의 낯섦은 외려 바스락거릴 정도로 낡고, 소리 내 읽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착오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아직도 ‘지금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말미암는다. 이 지난 것들이 여전히 물러가지 않았으며, 우리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사실. 그것이 낯섦을 만든다.
헤아릴 수 없는 희생만큼, 다시 성취가 존재한다. 이룩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또다시 불편한 것이 기립하고, 불행은 도처에 창궐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실패나 역사의 종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알릴 뿐이다. 부족한 것은 고작 그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 앞에서 기꺼이 침울해질 수 있다. 기쁜 소식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침울해질 수 있다면, 늘 그래왔듯 더한 사건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전시도 우리가 기다려왔던 사건이다.
참조
안동일, 전시 서문, ⟪오발탄⟫ 리플렛, 2020.
안동일, 「Installation-view」, ⟪오발탄⟫ 리플렛, 2020.
Sharon Langley et al., 『A Ride to Remember: A Civil Rights Story』, Abrams Books, 2020.
『Gravity Effect』 Issue. 6: EULJIRO에 부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