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인컬처』 2025년 4월호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다. 렌즈는 타인을 응시하는 대신, 그와 함께 머문 감각을 기록한다. 이미지는 한순간의 얼굴이 아니라, 그 낯을 마주한 침묵과 호흡, 감정의 진동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나아가 보는 일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청’과 닮아있다. 천경우의 사진이 그렇다. 그의 사진은 이미지의 형상보다 시간의 흐름을, 재현보다 감응의 자취를 담아낸다. 작가는 흔히 사진에서 요구되는 명료한 형상을 의도적으로 감춘다. 그러나 장노출이 시현하는 육체의 미세한 떨림, 네거티브로 포착되는 어둠 속 잔영, 밀착된 피사체 사이에 형성되는 내밀한 관계… 일상의 육안으로 미처 감지하지 못한 존재들이 사진이라는 경청 아래에서 비로소 현현한다. 그리고 이 경청을 논하려면 천경우가 보여주는 감춤과 드러냄의 섬세한 균형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청이 목소리를 잃은 이들, 즉 소외된 존재를 향해왔다는 점이다. 때로 가장 고요한 사진이 가장 뜨거운 목소리를 품는다. 천경우의 사진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바로 그 일을, 그것도 아주 철저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펼쳐왔다. 작가는 최근 팔마 카살소예릭(Casalsolleric)과 롯데갤러리 잠실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대표작과 함께 최근에 발표한 전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시간의 중첩, 재현 불가능성의 재현
리얼리즘이 치열한 재현을 통해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할 때, 모더니즘은 진실이 어떤 면에서 불가능한지를 성찰하면서 표현으로부터 진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천경우의 사진에 이 둘은 함께 있다. 재현은 재현대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반성은 또 그것대로 자기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진실은 포착할 수 없다, 그럼에도 포착해야 한다. 첫 인물 사진인 <Aura>(1992~94)에서 <Thirty-Minute Dialogue>(2000), <One-Hour-Portrait>(2002), <Six Days>(2003)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초반 활동은 인물 사진에 집중된다. 작품명에 곧잘 등장하는 ‘시간’은 천경우 포트레이트의 핵심 개념이자 실제 촬영에 걸린 기간이다. “사진은 단지 이미지일 뿐, 인물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의 내면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난다. 내가 지향하는 사진은 한눈에 읽히거나, 충격적으로 와 닿는 사진이 아니라 불명확해 보일 수도 있으나 관찰자가 서서히 스스로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사진이다.” 사진은 인물을 재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인물의 ‘생’은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드러난다. 카메라 앞에서 인물은 렌즈를 응시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보거나 공간을 느끼고, 움직이며 대화를 나눈다. 이때 화면은 찰나에 멈추지 않고, 피사체는 포즈로 고정되지 않는다. 일련의 과정은 장노출을 통해 한 장면에 중첩된다. 그렇게 가장 흐릿하면서 가장 밀도 높은 화면이 완성된다.

형상을 포착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완성해 버릴 수도 없다는 난관이 작가 앞에 있다. 피사체의 모습을 현상해야 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불가능한 재현에 도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인물 사진이 장노출을 거쳐 형상화와 해체를 반복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함께 사유되고 있고 또 그것의 극복이 함께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 천경우 사진의 한 성취다. 그렇다면 장노출은 어떻게 이러한 이중적 효과를 가능하게 하는 걸까? 이는 장노출의 긴 시간이 인물의 몸에 감정을 서서히 스며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내용은 ‘관계’다. “한 인간의 존재는 타인의 존재, 상호 투영을 통해 비로소 규정되며 사람의 고유한 이름 또한 타인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이 말은 반만 옳다. 관계를 맺은 타인은 자유를 준다.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나’로 갱신하게 하는 자유다. “사람은 시간의 흐름 자체이고 ‘상호 작용’ 속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한한 시각적 현상의 주체이다.” <Thirty-Minute Dialogue>에는 인물이 30분간 타인과 마주 보고 대화하는 상황을 설정했고, <One-Hour-Portrait>에선 인간과의 소통에서 나아가 피사체가 놓인 공간의 모든 사물과 교감하도록 요구했으며, <Six Days>는 시간을 대폭 늘려 6일 동안 일정한 시간에 작가와 함께 일상을 돌아보도록 했다. 시간 위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은 편안하거나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그리고 새로운 얼굴로 변해 간다. 즉 무한한 ‘나’를 만들어간다.
다시 말하자. 재현은 완결되지 않는다. 하나의 진실이 포착되는 순간, 대상은 도로 빠져나가고 작가에게는 또 다른 진실이 필요하다. 이 불가능성의 궤적은 작가의 사진을 퍼포먼스의 층위로 향하게 한다. 예술로서의 사진이 일상 사진과 다르다면, 거기에 놓인 재현 불가능성 때문일 테다. 예술 아닌 사진은 현상된 세계가 사진의 전부라고 말하지만,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사진은 그 세계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형상에서 비형상으로 다시 또 형상으로 무한한 주체를 확장한다. 무질서한 실루엣이 서로 당겼다 밀어냈다 하는 별처럼 새 성좌를 엮는다. 사진이 단일한 형상의 포착 이상의 것이라면, 사진은 단순히 ‘찍는 행위(shooting)’로 한정되지 않는다. 촬영은 사진 이전의 시간, 혹은 사진 이후의 시간으로 확장돼야 하며, 피사체는 수동적인 모델이 아닌 참여하는 주체로 나아가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천경우는 피사체를 모델로 부르기를 거부한다. “나는 모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사진가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선택해서 찍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오거나 같이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작가에게 퍼포먼스는 사진 외부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이 도달하고자 했던 감각의 핵심을 구현하는 기제다. 다시 말해 그의 퍼포먼스는 사진의 확장된 조건이다. 이러한 사유는 이후의 작업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된다. 렌즈 앞의 인물과 맺던 관계는 이제 참여자의 몸과 몸,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교감으로 확장한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경청의 에티카
2000년대 들어 천경우 사진에선 퍼포먼스와 함께 ‘수행성(performativity)’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수행성이란 어떤 행위를 통해 주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Believing is Seeing>(2006~07)에서 작가는 앞을 볼 수 없는 어린이, 청소년을 섭외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주문했다. 앞서 살핀 연작과 비슷한 형식을 지니면서도 그것과 대별되는 점은 참여자의 행위가 부조리한 일이라는 점이다. 즉 재현 불가능성은 더 이상 작가의 주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퍼포머에게 던져진 실존적 과제가 된다. 그것이 진실에 도달하든 도달하지 않든 참여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스로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BreaThings>(2008~09)에선 참여자가 의자, 화병, 야구공 등의 오브제를 들게 했다. 처음엔 사물이 인물의 숨을 따라 오르내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폭을 조절하는 키는 사물이 지니게 된다. 참여자는 이 순간 목소리는 없으나 질감과 무게가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여기서 천경우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작가는 현상된 프레임에 사물만을 남겼다.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사진에서 숨의 진동은 오로지 사물의 것이다. 즉 사물이 숨을 쉰다. 이 구도를 통해 불가능한 경청은 작가, 퍼포머를 거쳐 마침내 감상자의 몫으로 도달한다. 우리는 그를 존재하고, 가고, 말할 수 있는 주체로 계시해야 하는 용기를 부여받는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와 그것에 대한 경청. 이는 천경우 사진에서 반복되는 서사다. 그리고 목소리 없는 자엔 비단 사물만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물리적으로 목소리가 막힌 비인간이라면 사회엔 구조적으로 목소리를 잃은 자들이 존재한다. 장애인(<Believing is Seeing>, <Songs without Lyric>(2021))과 노동자(<Pause>(2015)), 자연(<Bird Listener>(2021), <Resonance>(2023))이 그렇다. <BreaThings>에서 우리가 사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작업 역시 감상자에게 재현 불가능성의 책무를 맡긴다. 감상자의 삶마저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에서 천경우 사진은 더욱 퍼포머티브하다. 우리는 목소리 잃은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회의 소외된 목소리를 물어야 한다. 목소리를 잃은 자는 누구인가, 어째서 들리지 않았는가.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린 무엇에 경청해야 하는가…. 그것이 들을 수 있는 자의 윤리이며, 사진이 전하는 ‘에티카(ethica)’다. 그의 작품이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작가, 참여자 그리고 감상자로 이어지는 경청에 대한 연쇄 때문이고, 여러 번 되풀이해 보아도 그 매혹이 소진되지 않는 것은 경청의 불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온 세계가 성공을 찬미할 때 천경우의 사진은 불가능에 천착한 실패가 남기는 ‘의미’를 새긴다. 반대로 온 세계가 패배를 예상할 때 작가는 다음과 그다음, 다시 이후를 기약하면서 희망을 찾는다.

<Pause>와 <Dabbawalla’s Lunch>(2017)를 통해 그의 에티카를 더 돌아보자. 두 작품은 사진이 아니라 현장 퍼포먼스와 그를 통해 남은 기록이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다. 전자에선 퀵 서비스 기사가, 후자에선 도시락 배달부가 등장한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천경우가 참여자에게 요청한 내용은 같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매번 타인의 요청에 따라 몸을 움직이던 그들은 처음으로 원하는 곳에 가거나, 바라왔던 음식을 주문했다. “급한 물건을 수령할 때 문 너머로 들리곤 하는 ‘퀵입니다!’는 자신을 ‘빠른’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위험천만한 고성능 기계, 보호복과 헬멧은 사람의 존재를 망각하게 하지만 달리는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작업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이는 작가와 참여자이지만 그 목소리 때문에 삶이, 세상이 가장 크게 바뀌는 이는 감상자다. 이른바 라이더로 불리는 배달 노동자는 일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프랜차이즈의 브랜드로, 목소리는 배기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천경우의 사진으로부터 감상자는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 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작업이 경청하게 하는 것들이다. 장노출의 흐릿한 윤곽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복면을 쓰고 있으며, 초인종을 누르고 순식간에 사라지니까. 대신 그들이 향했던 장소와 먹었던 도시락의 기록은 우리의 일상으로 번진다. 일상에서 가려져 있던 목소리가 들린다.
영원히 ‘경청’을 포기하지 말기
최근 천경우가 발표한 <Resonancia>전과 <Bird Listener>전에서 경청은 자연을 향한다. 각 전시의 주제작인 〈Resonance〉(2023)와 〈Bird Listener〉(2021)는 새, 나무에 귀 기울이는 퍼포먼스를 중심에 뒀다. 〈Bird Listener〉는 발리사리섬 숲에 서식하는 새 소리와, 그 새의 형상을 상상해 그린 관객 참여 드로잉을 함께 설치했다. 〈Resonance〉는 인도 고아 지방의 어린이가 숲에 노래를 들려주는 퍼포먼스로 완성된 사진이다. 여기서 발리사리의 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숲을 향한 세레나데가 어떤 멜로디를 띠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새는 오직 실루엣으로 그려지도록 요구받았고, 사진은 노래가 들리지 않으니까. 나아가 〈Resonance〉는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도록 반전된 사진으로 남았다. 중요한 것은 잘 그리고, 잘 불렀느냐가 아니다. 이전 작업에서 천경우가 ‘나(타인)는 누구인가’ 또 ‘나는 무엇을 들을 수 있는/없는가’라는 물음에 천착해 왔다면, 이번 전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계는 어떤 세계여야 하는가’라는 생태적 질문에 도달했다.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는 게 개인의 수행이라면, 누구에게 어떤 목소리(형상)를 부여하고, 어떤 목소리를 들려줄 것인가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세계의 재구성을 요청한다. 경청의 과정에서 내 삶의 방향 전환이 이뤄질 때 그 폭과 깊이는 타인을 향한 실천에 달려있다. 이는 더 나은 ‘나’가 되는 일을 넘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윤리적 확장이다.

그러나 천경우의 사진에 어떤 정치, 윤리적 당위가 결부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들어야 하는 목소리가 어떤 어조이기를 바란 적 없고, 건네야 하는 목소리에 특정한 내용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대신 작가가 끊임없이 주지하는 한 가지의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영원히 경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결한 재현은, 경청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경청하는 한 ‘나’는, 우리는, 세계는 더 나은 곳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