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사이드갤러리, 화가 최진욱 개인전
최진욱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풍경으로 동시대 사회를 담는다. 감각적인 색감과 은유적인 이미지로 익숙한 일상을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 밀착한 문제의식을 회화적 정치성으로 풀어왔다. 그의 개인전 <창신동의 달>(3. 14~4. 13)이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창신동, 인왕산, 동해, 작업실 등의 정경을 담은 그림 19점을 선보였다. 개별적인 건물, 장소, 오브제를 하나의 장면으로 연결해 미시사와 거시사의 연속성을 드러냈다.
최진욱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묻는 질문에 “예술가는 광산의 ‘카나리아’다. 가장 먼저 위기를 느끼고, 이를 가장 먼저 알리는 존재.”라고 답했다. 과거의 글에선 “예술은 예술이지 않아야 한다. 혁명을 예고하거나, 새로운 공간을 열 때만 예술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청년 실업, 주거 불안정, 남북 분단, 노동 분쟁 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미술계는 물론 정치적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최진욱의 그림이 사회와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은유’를 통해서다. 그의 화면엔 성난 투사도, 울부짖는 피해자도, 참혹한 참사의 현장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의 그림은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과 미술을 단단히 동여맨다.
<렌트>(2022) 연작은 일견 도시의 풍경을 담은 평범한 조감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성을 톺아보면 여기엔 세 개의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낡은 집이 빽빽이 들어선 ‘구시가지’, 이곳을 삼킬 듯 덮쳐오는 ‘신도시’의 파도 그리고 양쪽 모두에 자신의 터를 빼앗긴 ‘자연’이 바로 그것이다. 빈부 격차에 따른 주거 문제와 도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를 한 화면에 펼쳤다.
<렌트> 시리즈는 아마도예술공간에서 2022년 열린 동명의 주제전에서 출발했다. 지난 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의 대비로 토지 소유제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이번 출품작에서는 구도를 넓혀 계급적 갈등을 함께 꼬집었다. 한편 건물 사이로 솟아오르는 분홍색은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직접적인 영감은 최민화 작가의 <분홍> 연작에서 왔다. 그에게 분홍색은 저항을 의미했다. 색에 담긴 여운을 내 작품에 가져와 새기고 싶었다.”
“그림은 사람을 바꾼다”
정치적 의제를 다루면서도 은유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최진욱은 이를 ‘감성적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담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 그림을 사이비 리얼리즘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한 장면으로 구획될 수 없다. 화가가 임의로 대상을 편집하면 재현은 곡해되고 만다.”
실재는 무한하기 때문에 유한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직설적인 묘사는 관계를 왜곡하고 감상자가 사유할 기회를 빼앗는다. 작품은 진실을 직접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감상자가 다양한 관점으로 진실을 찾게 만드는 수수께끼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감각으로는 필연코 이해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제시하는 매개로 ‘감성’을 제시한다. 현실은 이해가 아닌 ‘느낌’의 대상이다. 그리고 여기에 최진욱의 ‘리얼리티’가 개인의 경험, ‘미시사’에서 출발하는 이유가 있다. 감상은 오직 일인칭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재현의 문제는 <창신동의 달>(2023) 시리즈에서도 이어진다. <렌트>에서 감성적 리얼리즘이 구성을 통해 드러났다면, <창신동의 달>에선 형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풍경은 원근에 따라 구상과 추상으로 나뉜다. 가까운 거리의 건물은 구체적인 윤곽을 갖추고 있지만,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대상은 색 면으로 추상화된다. 그러나 이는 원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진욱은 구상과 추상을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작가에게 리얼리티는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양자의 긴장에 존재한다. “현실은 물질과 개념을 함께 갖고 있다. 구상은 현실의 외피를 담아내지만, 그 너머의 관념을 잃어버리고, 추상은 관념을 붙잡아도 구체적인 삶과 무관해지고 만다.”
최진욱이 리얼리즘을 통해 일관되게 비판해 온 현실은 ‘자본주의’다. 착취와 소외, 차별에서 해방된 사회를 꿈꾸며, 이상을 위한 실천을 이어왔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물질인 동시에 관념이다. 전자가 화폐와 시장, 노동 등으로 존재한다면, 후자는 경쟁, 소유, 통제로 작동한다. 자본주의의 양면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 화면은 구상과 추상을 오가야 했다. 한편 달은 ‘희망’을 은유한다. <창신동의 달>은 <렌트>에서 출발했다. 부조리한 현실을 재현하면서도 그림의 메시지가 비관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올린 게 ‘달’이다. 연작에서 달은 구름에 가려져 모양마저 불투명해지지만, 그 밝기만은 잃지 않는다. 달 주변으로 하늘은 빨려 들어가듯 소용돌이친다. 달은 현실을 넘어 이상으로 향하는 포털이다.
희망의 메시지는 <447.눈 온 뒤 인왕산>(2024)에서도 반복된다. 지난겨울의 기억을 담았지만, 화면엔 눈보다 초록의 색 면이 무질서하게 오간다. 작가에게 녹색은 피를 의미한다. 작가는 <비무장지대 작업전>(1995)에서 탈영병의 주검을 주제로 <화가의 죽음>(1995)을 출품했다. 이 그림에서도 피는 녹색으로 그려졌다. 녹색은 붉은색의 보색이다. 폭력의 상흔을 뇌리에 새기면서도 그것이 평화라는 이상을 상기시키도록 의도했다. 같은 맥락에서 녹색으로 물든 <447.눈 온 뒤 인왕산>의 풍경은 상처 입은 현실을 은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초록은 그 상처를 넘어서 도래할 봄의 물결이기도 하다.
은유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비극에 얽매이지 않고 이상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것. 최진욱은 화가로서의 목표를 그렇게 고백했다. 작가는 자신을 줄곧 ‘깽판 사회주의자’로 소개해 왔고, 변함없이 변혁을 꿈꾼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사람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그림에 있다.”
◼︎ 『아트인컬처』 2024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