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 2_손배영: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

손배영, <제자리에 있거나 제자리가 아닌 것들의 위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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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이도 사랑받은 이도 결국 파멸로 끝을 맺는, 구원이라고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비제의 <카르멘>에서 니체는 완전하게 구원된 무언가를 찾아내 소리 낸다. 그것은 다른 모든 인물들이 파멸했기에 오히려 구원될 수 있었던 혹은 파멸로부터 달성된 자연적 사랑이다. “결국에는 사랑을, 자연으로 다시 옮겨진 사랑을! ‘고결한 처녀’의 사랑이 아니고! 센타의 감상도 아닌! (…) 바로 그래서 그 사랑에는 자연이 깃들어 있는 겁니다.”(『바그너의 경우』) 인간이 진행하는 사랑보다 인간의 주검 뒤에 의미만이 남은 사랑은, 그리고 의미보다 ‘자연’이 강조된 사랑에서 이러한 증명은 반드시 인간으로 구성된 주체의 역사에서 주체인 인간을 패퇴시키고, 자연(적 사랑)이란 주체의 입회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란 주체에 종속된 ‘사랑’은 비로소 …의 사랑이란 소유격을 벗어나 오롯한 의미를 되찾으며 그로부터 자연은 소생한다. 그렇게 실천에서 주체가 해소될 때, 의미는 강조되며 억압되었던 것은 부활하거나 회생回生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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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 이것은 당신을 위한 종말_이윤희, 손배영, 최은: 골목유랑기

이윤희, 손배영, 최은, ⟨사소한 완강함을 위한 쇼룸⟩, 2018

“모든 이들이 깊은 마음 속에선 세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1Q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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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을 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리고 과거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점들 그리고 오점들을, 인정하고 삼킬 것을 각오하고 선언했다. “내가 잘할게.” 당신의 오래고 먼 연락을 기다릴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변덕에 호응하고 독과 같은 말을 참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초과할 아직은 빈칸의 어떤 것. 그것을 담보로 비었던 사랑을 잠시간 빚져 온대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사랑에 부족한 것이 있어 그것을 채움으로 존속되거나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 자체가 없었음을. 사랑의 양태, 형상, 질료와 같은 것들이 변질된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별을 짓는 것은 ‘사랑 아님’의 어떤 것임을. 

아도르노가 2차 세계대전 속에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계몽의 변증법」, 1944, 서문)라고 물을 때 그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우리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을 이성과 그것의 여정이었던 계몽으로 지목하고 철학이 조금 더 해석에 나서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잘할게”로 들린다. 그러나 그의 비관적인 이 근심은 어쩌면 끝끝내 낙관적이었다.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해왔던 성찰들과 더 나은 세계를 창립하고자 했던 실천들은 사실 전체와 동일성 아래 개별적인 것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폭력이었다는 것. 그렇게 모든 혁명은 전체주의로 끝났음을 마주하고도 그는 끝내 이별을 짓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아냈다. 이별을 짓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벤야민도, 사르트르도 그리고 아렌트조차도. 아마도 철학은 거기에 힘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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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능성에 대한 끈질긴 사랑_하므음: 둘, 셋의 공통감각

하므음, 묘리기, 2017, 예술공간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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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의 선물을 고르다 망설였다. 나는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통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검은색이고, 그렇지만 꽃을 고를 때는 파스텔톤을 선호하고. 코코아를 좋아하지만 정작 쓰고 달지 않은 코코아를 찾는 당신까지는 내가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와 느낌 앞에서 나는 한참이 모호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검은색이 어떤 위안을 주는지 몰랐고, 파스텔 톤이 당신을 어떻게 물들이는지, 그런 코코아에 심심함 말고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모호하지만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모호 속에서도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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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삶을 짓는 자 편에_백은하: 기억의 활용(상상과 실재)

백은하, 몽환 夢幻, 2017,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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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실재의 반의어로 사용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실재를 위협하거나 적대하는 것만을 수행하지 않고, 실재에 의해 폭로된 이후에 말소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이라면 그가 걷는 동안 환상은 그의 한 편을 부축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거나 ‘정의로운 대한민국’과 같은 믿음은 지난 십년 동안 보탬이 되지 않는 환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여전히 선한 사람이 존재한다거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그것이 마음껏 환상임을 지적해 조롱한다고해도 멈춘 걸음을 재촉하고 부축했다. 또 비단 이러한 거대한 환상만이 존재를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지극히 소박하거나 개인적인 환상이 존재를 지탱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할 거야’라거나 누군가와 늘 함께 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 혹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까지. 감히 환상이라고 부르기 무서운 이 가상들은 어느 한 번 증명조차 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 없이 우리의 삶은 실재를 버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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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가 앵무새가 아닐 때_진영: happy island

진영, , 2017,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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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업이 갖게 되는 영토가 하나의 캔버스일 리가 없다. ‘의미’가 미끄러지는 것이라면, 그래서 작품은 늘 작가보다 말이 많은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동시에 작업의 구획도 늘 범람하고 침범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찰하는 ‘존재’ 스스로 작업의 영토 안으로 걸음하는 것을 또한 전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작업의 영토가 고작 하나의 액자 따위일 리 없으니, 시선은 프레임 안을 집요하게 서성이고 또 요동치다가 마침내 구획을 벗어나 외부로 나간다. 한 작업의 가장자리와 둘레가 연장된다면 그 장소에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혹은 한 작업은 하나의 세계에 일부분에 해당되는 조각이기에, 그 조각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만 현상되도록 허락한 필연성이 외부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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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심장 타던 무늬_윤지현: Emotional Lumps

윤지현, , 2017,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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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잦은 예술인 영화나 연속극에서도 ‘상처’는 거의 늘 더 나은 삶에 대한 계기가 되거나, 종국에는 최소한의 어떠한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한 정상적인 지불로 취급된다.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올바른 세계가 될 수 있다는 당위를 담은 ‘상처’의 윤리학에 의거한 서술일 수도 있고, 그런 당위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영리한 왜곡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늘 우리는 타인의 상처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상처는 대체로 훌륭한 이야기가 되어왔다. 상처가 대체로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상처의 끄트머리에 자주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대부분 개인과 개인이라는 개인적 층위에서 단독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는 개인적 삶에서 시작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개인을 불행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상처는 세계 비판을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매개체이자 보편적 정서가 된다.

그러나 상처가 삶의 경험치가 된다고 해서, 또 세계 비판의 입구가 된다고 해서, 그렇게 불행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때나 있는 흔한 것이기 때문에 소홀하거나 쉽게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죽기 위해 사는 법」, 78쪽) 상처를 경유하고, 불행을 다루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경험치가 된다면, 혹은 그게 아니라 경험치 조차 되지 못한다면, 또 세계 비판의 입구가 되어 그렇게 늘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을 이유로 더욱 절박하게 다뤄져야만 한다. 하나의 상처도 보편적인 정서의 일부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상의 것으로 세상에 유일무이하도록 남길 것. 그래서 상처 앞에 ‘누구나 다 그래’라는 말은 소금이 된다. 그 절박함 후에야 타인의 불행을 왈가왈부하는 일은 드물게 용서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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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샘플링_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아르코미술관, 전시 《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포스터, 2016

철학은 그저 부유물이다. 그것은 그래서 구체적인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쉽게 희미해지고 힘을 잃는 듯 보이지만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매개하여 관계하며 어느 때에 가서는 장소를 가지기도 한다. 분명 그것은 드물지만 자주, 장소를 갖는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은 여전히 혁명의 공기가 부유하는 곳이며 민주주의란 철학이 거주지를 마련한 장소이다.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은 노동이 해방의 계기이면서도 정치의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임을 여전히 증명하는 거주지이다. 우리의 장소도 다르지 않다. 광주의 금남로부터 명동 성당, 서울역 광장들에는 모두 해방과 민주주의가 부유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루되지 않은 장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철학을 거주시키고 있다. 도로, 병원, 학교, 극장 그리고 아케이드까지, 모든 장소는 어떤 철학을 소유하거나 어떤 철학을 배제시키고 밀어낸다.-이러한 측면은 푸코와 벤야민, 데이비드 하비 등의 저작에서도 발견된다- 만약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어떤 철학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장소에 철학이 부유하거나 거주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감지하지 못하는 ‘사적소유’만이 관련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들의 철학이 부유하는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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