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_RRRRRRRRRRR..

⟪RRRRRRRRRRR..⟫ 전시 포스터, out_sight, 2020. (포스터 디자인: 정윤하)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1이 글의 제목은 뜨거운 감자의 <좌절 금지>의 가사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에서 인용했다.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글귀나 형상이 있을 것인 한, 의무는 도무지 저버리지 못한다. 마지못해 해안선에 도착하는 비지 않은 병들. 비로소 그 병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제 발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짓고 지은 것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냐고는 물을 수 없다. 구원은 절망의 무릎에서 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병 안에는, 오직 흘겨 볼 시야와 성토할 입조차 잃은 절망의 나락에서 찾은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는 부재하는 목격과 증언을 갈음할 유일한 증거가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단지 어떻게 끝날지는 선택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해안선에 도달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근처까지 도착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달과 도착을 가지고 실패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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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되는 원질_강석호, 이은주: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

강석호, 이은주 기획,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 아트스페이스3, 2020, 전시포스터

아르케로서의 물, 원자, 수數 그리고 최근의 렙톤에서 쿼크까지, 더는 분할할 수도 가감할 수도 없는 원질에 대한 발견은 끊임없이 분할되고 가감되는, 즉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않는 진실한 것을 탐색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세계가 ‘진실’히 실재하는 것이라면 이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서 그 진실을 야기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태도는, 이제 가상에 접착된 미술에게도 받아들여진다. 가상이 아름다움을 지어내고, 그때의 아름다움이 진실한 것이라면, 가상의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선 마찬가지로 어떤 변치않는 원질이 있을 것이라는 것.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는 분명 소문으로만 떠돌던 원질을 가상의 끝까지 다가가 발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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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_백지훈: Nontype

백지훈, ⟪Nontype⟫, 비영리공간 싹,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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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기에 의심이 가해진다 전해지지만, 때로는 확실히 믿기 위해서 절박한 마음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도 있을 줄 안다. 그러니 폭발은 미움 없이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것이 산산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저주 같은 동기란 가지지 않고, 외려 그 폭발 이후에도 무언가 남아있기를 바라고 있다. 노도 치는 불길과 귀청을 찢는 폭음에도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어떤 것이 저 재 위와 잔해 아래에 남아있기를.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비로소 본질이라고 할 수 있거나 핵이라고 여겨질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엔 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치장이나 세련됨을 위하여 겹쳐있었고, 어느새 독을 흘린 것 마냥 악취가 나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이 겨운 때가 있었다. 의심하는 자가 생겼고, 믿지 못하는 자가 생겼다. 그러나 믿고 싶기에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심술궂기보다 말했듯 절박함에 서리어 있다. 백지훈의 ⟪Nontype⟫(비영리공간 싹, 2020.11.14.-27.) 을 보면 그런 마음이 떠올랐다. 분명 여기에 무언가 남아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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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옥에서 살아요_최수련: 태평선전

최수련, ⟪태평선전⟫, 인천아트플랫폼,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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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아니라고 반하고 싶었지만, 인상착의도 그림자도 없이 체포되는 그를 보게 된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물을 수 없다. 찾아온 이가 들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저지르지 않은 죄와 그래서 어떤 혐의인지도 알지 못할 죄에 대해서 혐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정은 이 체포만큼이나 맹목적이고 불가항력이어서 소(訴)는 심판이 아닐 길이 없다. 한 치도 순결하므로, 그는 법정에 회부되었음에도 법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출입은 마냥 지연될 것이다. 법이 알려지지 않은 선에서 또 어떤 죄인지 모르는 선에서 그러니까 영원히 맹목적인 한에서만 심판은 공평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 공평한 연유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디도 살피지 않고 공평히 유죄만을 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지만 또 어느 곳에도 없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삶의 내내 선명히 있는 심판이다. 미심쩍고 유감스러운 이 법의 이름은 늘 섭리로 불렸다. 매일 새로운 소식에 포함된 무죄한 약자, 타자, 소수자 따위들의 고통도 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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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유기체로 아버지_안부: 잘-못-하다

안부, ⟪잘-못-하다⟫, 킵인터치서울,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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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만 가져가면 사랑하던 것들은 모두 녹아내렸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는지에 관한 확신은 과거보다 낡은 것으로, 미신보다 수상한 것으로 이다지도 변천을 벗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산만한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쓰임새는 없는 것이지. 돈보다 더 좋은 것이에요. 꼭 그래야겠니. 집이라는 영토에서 길러졌지만, 고작 밤이 깊어서야 그 영토 안을 쭈뼛거리며 입장할 수 있게 된 이는 영토 밖의 너비와 시간만큼 사투리를 배웠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는 영토를 만든 그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아비라고 여길 수 없었다. 이방인은 가정에서 색료 냄새 거두지 않는 곳으로 또 저울 없는 도수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생물적 아비를 부정하고 이념이라는 의붓아비를 섬기게 된 까닭이다. 이 불화로부터 구호 받기 위해서 번역자에게 사정을 해볼 수도 있고, 옛 언어를 더듬으며 교류에 나설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토 안의 안온을 위한 것이지 사랑하던 그러나 녹아내린 것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은 그에게 건넨 녹아내린 것들을 위하여, 건너에 있는 그가 외려 ‘이방인’이 되도록 영토 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녹은 것들은 응고될 것이고, 아비 역시 응고된 것이라면 녹아내릴 것이다. 당신은 거기 말고 여기서 아름다워라. 그렇다면 변천을 벗어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빙되는 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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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연인_허단비: 영혼의 발돋움

 

허단비, ⟨죽음 새로운 시작⟩, 130.3×162.2, oil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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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절망에 비해서 아름답지 않다. 차라리 나는, 연락한다는 말보다 다시 볼 일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더 기대했었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보다 거절이 이미 도착했으면 했었고, 그러다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북돋움 대신 남은 것은 불행뿐이라는 선고를 기다렸을 처지였다. 그저 버티지 않고 기대기만 하면, 중력이 이끄는 대로 편히 침잠할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온이 거기 절망에 있었다. 그것을 마다했던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름답지 않은 것은 희망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증오스러운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패배의 순간은 대부분 추함을 소복이 담고 말기에, 그것은 그 추함으로써 희망을 반드시 떠올리게 했다. 희망이 거기에 있어 기꺼이 포기하지 못했고, 울먹이며 처분을 기다릴 기회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적은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청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못 하고 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내겐 내내 남는다. 평화와 안온이 그득한 아름다운 절망을 쥘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외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로, 강박적으로 희망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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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인가요_BGA Compliation 41.

표지 작품은 이해민선 <봉우리> 종이 위에 유채, 2017

미술은 모든 요소들이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진다. 그림을 보는 이가 각 부분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술은 보통, 시간예술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중에선 평면에 시간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존재한다. 이번 컴필레이션은 그러한 시도를 담는다. 그림의 개체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개체 윤곽이 불투명해지거나, 왜곡되는 것은 모두 존재가 생성이 되는 것으로써 시간을 갖는다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째서 문제일까. 고정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은 그것이 어디서부터(과거) 지금에 도착해있고 또 어디론가(미래)로 흘러갈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앞당기는 것을 통해서 현재를 다시 극복하려는 힘을 지닌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현재는 과거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자, 다시 미래를 위해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된다. / 조재연

9/14 「원은 회전하는 점」_박영준, ⟨곰곰⟩
9/15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1」_이해민선, ⟨봉우리⟩
9/16 「모든 것은 흘러내린다 2」_정희승, ⟨큰 폭포⟩
9/17 「반복이 아니라 번복」_박영준, ⟨패턴 16⟩
9/18 「하지만 몇 시인가요」_고현정, ⟨얼굴⟩

(미술 구독 서비스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에서 계속)

기억을 딛고 얻은 망각_남지연: Story(story)story))

남지연, ⟨Web_ compound of texts and images 1_1⟩, 91 x 91 cm, Acrylic on canva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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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는 구름과, 눈을 껌뻑일 때마다 쏟아지지 못해 기우는 달이 있는 밤들이라면 망각은 기억을 쉬이 앞질러 갈 터였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여 낡은 서랍 깊숙이 넣은 사진을 조각조각 내어 버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숨이 남아있을지 모를 심장을 태우는 일이었다. 심장 타는 냄새가 새벽 내내 났지만, 아침 안개가 그것을 머금곤 해가 뜨자마자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괜히 타고난 자리, 지글지글 끓던 곳을 정말 다 타버렸을까 보았을 때 그 자리엔 그을음조차 없었지만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내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통해서야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었고, 기어코 사진조차 없이도 선연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가 얻게 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날 밤,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내어준 대신에 지울 수 없는 것들을 새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게 망각만이 내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서야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파열의 발견만이 내가 어디서 온 이가 아니라,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이임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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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은 숯_BGA Compliation 31.

표지 작품은 이승주 <이상한 나라> 부분크롭, 캔버스에 아크릴, 2016

예술이 곧 정치는 아닐 것이다. 붓이나 펜을 잡는 것으로 혹은 미술관의 문턱을 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이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한에서 예술이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정확히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다. 예술은 그 현실을 보는 다른 논리, 다른 시선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다시 삶과 연결됨으로써 정치적이게 된다. 정치가 다른 삶을 발명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는 미술이 어떻게 정치의 개념을 건네는지, 어떤 식으로 정치를 미술에서 읽어낼 수 있는지를 볼 것이다. / 조재연

7/6 「행복은 절규」_이승주, ⟨이상한 나라⟩
7/7 「속세는 숭고」_이우성, ⟨당신은 왜 산에 오르십니까?⟩
7/8 「권능은 역량」_우정수, ⟨캄 더 스톰⟩
7/9 「중심은 주변」_최요한, ⟨Q_Fungi⟩
7/10 「블루는 화이트」_방성욱, ⟨Green Collar Workers⟩

(미술 구독 서비스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에서 계속)

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김학량, ⟪벽화⟫, 별관,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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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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