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의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배우들은 정확한 연기를 해냈고 특히 전도연은 시퀸스 어느 곳에서도 압도적이다. 메세지는 명료하며 또한 건조하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혜경(전도연)의 “진심이야?”라는 짧은 되물음이 불행의 연쇄 앞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려는 절박함을 쥐었을 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다른 각도에서라면 더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카테고리:] 문단들
실존주의의 없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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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허무하게 되는 때가 있다. 결론이 허무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논쟁 자체가 허무해지는. 그것은 짐짓 이해와 배려의 화신인 양 나타나서 모두를 이해하고 배려하라 하면서 논쟁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화신 중에 최근에 가장 모습을 많이 나타내는 것은 ‘개취’나 ‘취존’이라는 어법일 것이다. 정치를 논쟁하는 자리에서도 ‘취존’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언짢곤 했다. 모두가 선택을 가졌음으로 우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써 이 말은 위계와 지배, 정당성을 자처하는 무언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자유와 그것으로 비롯된 선택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런 옹호에는 과잉된 실존적 사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실존주의를 믿어도 될까. 그렇게 이 글은 시작한다.
사랑에 응답_자크 오디아르: 디판
사랑한다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라는 말과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고지식하게 같은 의미로 응답되기를 요청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요청하냐는 물음은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으며, 또다시 왜 사랑하냐는 물음 또한 해답을 얻기는 대부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물음을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빠진 후에야 역으로 던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한 그가 기꺼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풀릴 수 없는 동어반복에 우리는 다시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관점을 사랑한다는 말에 응답하는 자의 몫으로 돌려야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그가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타인에게 제공했다고 사고하며,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인정에 그친다면 그가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란 요원할 것이다. 그의 맘속에 샘솟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부심이란 감정일테니까. 그러므로 사랑에 응답하는 놀라운 일은 그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사고하면서, 그것이 자부심으로 향하는 인정으로 향하지 않을 때라는 조건 위에서 일어난다.
사건과 사고_댄 포글먼: 대니 콜린스
“그때 편지를 받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과 “사고”의 관계는 그 대상의 스케일에 따라 차이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주체가 받아드리는 태도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이 둘을 나누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먼저 사고는 주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사고라는 대상이 발생하기 전으로 회기하기를 요청한다. 주체는 대상이 발생하기 전의 주변의 상태와 그것에 영향을 받기 전의 스스로에 갈증을 느끼며 갈망한다. 주체는 사고가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꾸길 원하지 않으며 그에게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을 무언가다. 반면 사건의 주체는 정반대의 태도를 갖는다. 주체에게 사건은 그것이 좋든 싫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게 복구란 의미 없는 것이며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제 주체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실천으로 변화를 매개한다.
기꺼이 불행과 머물기_조지 오웰: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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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부조리하다. 삶의 도처에 부조리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부조리하다. 삼성 반도체 공장서는 필연적으로 백혈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한번쯤 갤럭시를 소유했고 평균적으로 13일을 12시간씩 가혹하게 일하면서도 그런 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물음에 “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망가지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애플의 대표적인 제조사인 폭스콘에 대해 듣고서도 아이폰의 예술성의 감탄하며 그를 다시 소유했다. 파업이 노동계급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인상적인 권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피부 위로 걸음하는 대중교통의 파업 소식에는 속이 상했다. 이런 것들이, 아니 그 외에도 무수한 경멸적인 문제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란 것이 시야에 그려질 때는 그것을 부정할 뻔 하다가도, 그것이 삐걱될 때마다 무수히 고개를 숙이는 숫자와 기호들의 그래프를 보면서 불안해하고 복구를 기도했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를 끌어안은 인간의 최선은 아마도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통체로 부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주변에서 아니면 스스로만이라도 구제되길 바라는 선택들에 골몰하 기꺼이 불행과 머물기_조지 오웰: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더보기
제거할 수 없는 자리, 자본의 대립항 노동_메이데이에 부침 출처
노동이 유쾌한 적은 대부분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날에 그것은 어느 시기보다 불안정하거나, 심각하고 폭력적인 격무 위에 올려져 있거나, 박탈당해진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두가 자본주의는 ‘아니다’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날 드문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운동가의 입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틈틈이 자선기관이나 인도주의기관에 의해서 고발되며 마침내 교황의 입에서도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고통들이 다큐이든 아포리즘이든 대체할 수 없는 정확한 묘사에 의해서 우리의 개탄이나 눈물을 지어낸다고 해서 그것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회피할 수 없는 물음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의 정치가 자본에 반하거나, 거스를 수 있을까’라고 하는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지체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정치를 떠올릴 수 있지만 91년을 전후로 제거할 수 없는 자리, 자본의 대립항 노동_메이데이에 부침 출처 더보기
사상으로서의 4.16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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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이 엄중할수록 말은 주춤거린다. 세월호 사태는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사유의 단절점으로 남았지만, 그 이후의 사유가 온전한 말이 되지 못할 거라는 의심을 견디기 힘들고 진실에 누가 될까봐 불안에 주춤거렸다. 그래서 주변의 용기 있는 벗들의 표현과 몸짓에 지지나 환호와 같은 반응 따위의 침묵이 변명씩이나 된다는 듯이 자위하곤 했다.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 존재하지만, 글을 놓기로 한 이유는 이번 글쓰기가 어쨌거나 비망록이 될 것이란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비망록이란 “지금으로서는 미처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을 대하면서 당장은 해결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둔 것”이기에 나는 이곳에 사유해야할 과제를 남기고 싶다.
다시 한 번, 전체에 대하여; 영화 <당통(Danton), 1983>
지난 12월 10일 서울시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를 결정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민위원회를 결성해 수차례의 회의를 모았고, 인권헌장의 내용 역시 특이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연역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헌장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소통·합의의 부재의 반증으로 이해한 것에서 발생했다. 민주주의의 정치란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는 정치이기에 반대가 격렬하다면 그것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추진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므로 재고하여 충분한 소통과 합의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은 그자체로 민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 찝찝한 일이고 분통스런 느낌 또한 제공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영화 <당통>이 표상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은 진보적인 작품이다. 문명의 저편에 존재하는 어둠의 심연을 찾아 떠나는 말로우의 여정 속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위선과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은 철저하게 고발되며, 근대 유럽의 문명이 낳았다고 표현되는 ‘위대한’ 커츠 대령의 어둠과 동화되어 변태된 모습은 유럽 식민주의가 은폐하는 문명의 이중성과 야만을 반성하게 한다. 소설이 갖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과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근대를 지탱하고 추동시켜온 계몽정신-이성-의 야만성을 드러낸 이러한 전복적 시도들은 작품의 진보성을 입증시키는 데 성공한다. 분명 소설은 당대 어느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는 비판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둠의 심연>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콘래드는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1975년 나이지리아의 유명 비평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로부터 소설의 진보성은 추락한다. 아체베의 비평 속에서 콘래드는 당대의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가 발붙이고 있는 지면은 식민사관임이, 여전히 그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노출된다. 그가 백인 여성을 대상으로 “애도 중이었다.”라든지 “성숙한 충정과 신뢰 그리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더보기
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
이해한다는 말은 애초에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말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내가 너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는 다행스러운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같아 질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의 간극만큼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못한다”라는 문법이 존재하고, 그 간극에 실례를 구하며 이해를 ‘양해’라는 말로 고쳐쓰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네가 나같아 질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그래서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려하거나, 상대를 나에 비추어 평가하려고 한다. 이 망각은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르다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망각은 처음부터 ‘이해한다는 말’과 ‘같아진다는 말’의 목적지가 행동이 아니라 느낌을 향해있기 때문에, 그러나 늘 행동을 향해 걷고있기 때문에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