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하는 미학_파레르곤과 이코노미메시스 이래로 칸트 ‘미학’ 읽기

, movi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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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큼 많은 소설, 전시, 공연, 음악 등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미’ 많은 시가 쓰여졌고, 많은 노래들이 불려지고 그리고 많은 전시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술가들은 차고 넘치고 또 생성되며, 예술에 유례없는 화폐가 삽입된다. 아 이거슨 인류 역사에는 절대 없었던 존나 아름다운 세계다. 그리고 비로소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요구하고 명령하지만, 동시에 세계는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든지 충분하게 존재할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세계가 아닐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힘도 절대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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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 빈 밤에 기억이 와있어_단식광대: 새벽달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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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본적(本籍)은 아마도 시(詩)겠지만, 노래가 기어코 시에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택한 그것은,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는 읽는 이의 시각과 정신을 온전히 소유해 제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 의미에 어렵사리 도달하게 만들지만, 노래는 듣는 이의 청각과 정신을 제압하지 않으면서도, 듣는 이가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함께 듣든 무엇을 행위하든 상관없이,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노래의 몫을 다한다. 다시 말해서, 노래는 배경 음악의 쓰임새처럼 소리를 전달하면서도 다른 소리를 빼앗지 않고, 다른 감각과 행위·정신에 공유와 연대에만 종사하는 ‘사적 소유’의 해방을 앞서 담지한다. 그리고 이점은 시와의 결별 이후의 노래가 겪은 성숙이면서도 또한 거의 모든 예술과의 차별됨이라는 점에서 노래가 가진 본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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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_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ㅣ押見 修造, 惡の華 중에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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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고인석에 앉았고 곧 판사가 들어온다. 이제 재판은 시작된다. 그런데 판사가 기침을 참기 위해 수건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뿔싸, 판사가 감기에 걸렸던가. 이번엔 판사가 배를 어루만진다. 젠장, 판사는 오늘 점심을 거른 것 같다. 그는 재빨리 그의 변호인에게 속삭였다. 판사는 독감에 걸린 게 틀림없으며, 저 꾀죄죄한 피부를 보니 잠도 못 잤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입맛이 없어 점심까지 걸렀을 것이 분명하다. 독감에 걸리고 점심도 안 챙겨 먹은 판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니 혹시 몸은 괜찮은지, 점심은 드셨는지 물어보라. 변호인은 애써 그의 고객을 진정시켰지만, 결국 그는 그의 예상대로 재판에서 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의로운 법 집행을 위해서 모든 율사(律士)는 재판마다 건강검진과 수면 체크와 의무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기로.

그리고 세계에서 겨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판사를 사적인 생활을 가지며 식사와 건강 따위를 걱정해야 하는 실존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 존재는 우리에게 걸어 다니는 법전이거나 기껏해야 숨을 쉬는 법의 화신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커피숍의 알바생은 걸어 다니는 커피 머신일 뿐이며 은행 창구 직원은 숨을 쉬는 ATM기 등등으로, 우리에게 인간은 그저 살아있는 사물로 현상(現像)된다. 우리는 그 사물에 엔간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세계는 유지되며 우린 그렇게 유지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건강과 식사를 점검하는 불필요한 물음과 의심을 두고 살아야 할 테니, 효용과 효율이 미덕인 세계에서 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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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샘플링_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아르코미술관, 전시 《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포스터, 2016

철학은 그저 부유물이다. 그것은 그래서 구체적인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쉽게 희미해지고 힘을 잃는 듯 보이지만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매개하여 관계하며 어느 때에 가서는 장소를 가지기도 한다. 분명 그것은 드물지만 자주, 장소를 갖는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은 여전히 혁명의 공기가 부유하는 곳이며 민주주의란 철학이 거주지를 마련한 장소이다.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은 노동이 해방의 계기이면서도 정치의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임을 여전히 증명하는 거주지이다. 우리의 장소도 다르지 않다. 광주의 금남로부터 명동 성당, 서울역 광장들에는 모두 해방과 민주주의가 부유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루되지 않은 장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철학을 거주시키고 있다. 도로, 병원, 학교, 극장 그리고 아케이드까지, 모든 장소는 어떤 철학을 소유하거나 어떤 철학을 배제시키고 밀어낸다.-이러한 측면은 푸코와 벤야민, 데이비드 하비 등의 저작에서도 발견된다- 만약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어떤 철학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장소에 철학이 부유하거나 거주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감지하지 못하는 ‘사적소유’만이 관련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들의 철학이 부유하는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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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실연이 알고 있는 혁명_다자이 오사무: 사양(斜陽)

Gerhard Richter, Betty, 1977

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하나는 1845년 봄에 마르크스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 쓴 것이며, 다른 하나는 1873년에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 1」)라고 적은 것이었다. 문장은 작가보다 말이 많아, 장르도 목표도 다른 두 명제는 각기 창궐하면서 마침내 조우하여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냈다.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하여 삶은 바꿔야 하며, 삶을 바꾸기 위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내 사랑이 불현듯 유산된 것은 ‘새’ 사랑을 납득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이니 다시 말해,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즉각 응답한 것은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고 했던 아방가르드였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이 명제는 삶에 어느 언저리에서도 정치를 그리고 대문자로 쓴 정치일지도 모를 ‘혁명’을 기어코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 씨팔 이게 다 세상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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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유다_보르헤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Andres Serrano, , 1987

⎪ “타락에 확신이 있는 듯 했다.” -토머스 E.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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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야? 배신을 마주한 사람은 이 말의 주인이 되는 것을 늘 피할 수 없다. 그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모든 스스로를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때 상대는 그 말을 망설였었구나, 불필요했던 그 행동을 해야 했구나 하면서. 이제 그가 이해했던 것은 그가 제일 잘한 ‘오해’가 되고, 그가 했던 미안한 오해들은 그가 제일 잘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가 쥔 결과물들이 사실은 거짓된 결론들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배신이란 ‘사건’의 서사를 파악하며 인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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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상실을 대하는 태도_이준익: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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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를 보는 내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의 하루키의 환영과 싸워야했다. 그 숲과 동주는 많은 유사점이 상실이란 주제로 저들을 대위했다. 시대가 일으키는 불화에서 시대를 지키는 것도, 시대에 저항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것을 솔직히 갈음하는 두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닮아있었다. 와타나베 토오루가 놓여진 시간은 일본의 화려한 고도성장 뒤에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던 맨얼굴 즉, 파시즘과 전체주의 적폐에 대한 저항 운동이 활발했던 전공투세대(全学共世代). 그러나 그는 맨얼굴을 인정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모두 거절한 채로 인정과 저항 두 태도를 포함한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문제에 천착한다. 윤동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시대의 어느 편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시대가 상실시키려하는 꿈, 사랑,  서정에 천착한다. 그러나 알듯이 문제는 그들이 맞이하는 풍경도, 결론도 모두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음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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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轉落)의 거리_오승욱: 무뢰한

<무뢰한>의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배우들은 정확한 연기를 해냈고 특히 전도연은 시퀸스 어느 곳에서도 압도적이다. 메세지는 명료하며 또한 건조하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는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혜경(전도연)의 “진심이야?”라는 짧은 되물음이 불행의 연쇄 앞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려는 절박함을 쥐었을 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다른 각도에서라면 더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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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의 없는 자리

Jackson Pollock_Painting_’53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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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허무하게 되는 때가 있다. 결론이 허무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논쟁 자체가 허무해지는. 그것은 짐짓 이해와 배려의 화신인 양 나타나서 모두를 이해하고 배려하라 하면서 논쟁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화신 중에 최근에 가장 모습을 많이 나타내는 것은 ‘개취’나 ‘취존’이라는 어법일 것이다. 정치를 논쟁하는 자리에서도 ‘취존’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면 언짢곤 했다. 모두가 선택을 가졌음으로 우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써 이 말은 위계와 지배, 정당성을 자처하는 무언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자유와 그것으로 비롯된 선택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런 옹호에는 과잉된 실존적 사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실존주의를 믿어도 될까. 그렇게 이 글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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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응답_자크 오디아르: 디판

사랑한다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라는 말과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고지식하게 같은 의미로 응답되기를 요청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요청하냐는 물음은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으며, 또다시 왜 사랑하냐는 물음 또한 해답을 얻기는 대부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물음을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빠진 후에야 역으로 던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한 그가 기꺼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풀릴 수 없는 동어반복에 우리는 다시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관점을 사랑한다는 말에 응답하는 자의 몫으로 돌려야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그가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타인에게 제공했다고 사고하며,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인정에 그친다면 그가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란 요원할 것이다. 그의 맘속에 샘솟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부심이란 감정일테니까. 그러므로 사랑에 응답하는 놀라운 일은 그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사고하면서, 그것이 자부심으로 향하는 인정으로 향하지 않을 때라는 조건 위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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