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가 개와 늑대의 시간_김학량: 벽화

김학량, ⟪벽화⟫, 별관,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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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져 왔듯이,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삶도 사유도 함유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어긋나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도무지 어긋나게 된다. 주어진 세상의 형편과 질서를 따를 때 그는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흐르는 것이라면 고랑을 따라갈 것임을 알고, 만유에 해당된다면 인력에 끌릴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자라면 규약에 따를 것임을 알고, 규약이 없는 경우라도 자연히 근면・성실과 같은 상상된 규범에 끌릴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존재에 안부를 묻는 인간은 없다. 움직이는 커피머신들, 움직이는 배달가방들…, 우리는 한 번도 안부를 묻지 못한 그들은 모두 존재로 드러난다. 이다지도, 움직인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삶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주어진 질서와 형편에 어긋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살아냄이, 주어진 것에 대한 사유가,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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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_이의록: Merry-Go-Round

이의록, ⟪Merry-Go-Round⟫, 산수문화, 2020. 4. 3.~26, 전시 포스터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일감을 손에 들었다. 흰 무명 양말을 깁는 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샤를르도 말이 없었다. 공기가 문 밑으로 새어들어와서 타일 위에 먼지가 조금 쓸렸다. 그는 먼지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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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없었다면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행성의 여백과 그 행성에 가장 가까운 항성을 빌릴 수 없었다면, 가난한 빈 마음이 어떤 식으로 차오르는지 또 따뜻해지는지를 도무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제 보슬히 내린 비가 없었다면 유망 없이 언제부터 마음이 스미었는지 해명하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로등 아래서 겨우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야,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스밈의 순간이 언제부터인지가 아니라, 지금 소록소록 젖고 있다는 것뿐임을 살필 수 있었다. 당신은 몇 번이나, 내가 건네려는 마음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느낌인지를 캐물을 수 있을 테지만, 나는 그것을 의미의 층위에서 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스스로에게만 출현하고 이르는 송곳 같아서. 내 안에서만 나를 찌르는 까닭이다. 그것은 내게만 영영 선명하여 아프다. 하물며 ‘좋아한다’라거나 ‘사랑한다’라는 말은 사용하기에 쉬이 충분하지 않아지며, 새로운 낱말을 찾기엔 내 사전은 곤란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에 사물이 있다. 대신에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침묵하지 않는 사물이 있어 의미와 느낌을 건넬 수 있다.

감정을 물질로 환원하는 것은 서글픈 일처럼 느껴진다. 분노가 어떤 물질 기관의 마비이며, 설렘이 일종의 물리적 수축일 때, 심지어는 사랑이 생체물질의 분비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술을 통해 도무지 닿을 수 없었던 타인의 정서를 전달하기로 했던 약속을 저버려야만 할 것 같다. 그렇게 서정은 영영 요원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가, 못내 말고자 한다. 외려 서정은 이다지도 물질에 닿는 것이라 말할 테다. 알고 보면 우리는 사물을 부르는 이름 말고는 약속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황혼은 절망의 시간을 의미하기로, 별은 희망을 의미하기로 약속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저마다 밤에 침전하고 별에 잠 못 이루는 까닭은, 그들이 충분할 수 없는 말의 사유를 대신하여 침전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을, 종신형 같은 희망을 대신 건네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같이 서정은 사물들을 빌려온다. 감정을 물질로 환원하는 것의 서글픔을 알면서도, 의미는 사물과 동등해지고 나서야 타인에게 건네질 수 있다.

외로움은 면치 못할 것이라 들었던 적이 있다. 함께 있는 동안에도 착각 말고는 외로움을 덮을 계획을 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도 말해졌다. 삶이 외롭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내내 외롭게 할 것이라는 말과 동시에 내가 타인을 내내 외롭게 할 것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서글픔을 알면서도 사물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예술은, 이다지도 예술이 남아 있는 것은 비록 그런 삶을 인정한 이후에도 그런 세계를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과 같다. 외로움은 면치 못할 일이지만 예술은 외려 착각에 헌신하고자 한다.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의 결심을 지속하는 데에도 도리는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에게 더 많은 사물과 더 많은 사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아직 낱말 대신 동등한 의미를 부여할 사물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그래서 건네지 못해 아직 착각 없는 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Merry-Go-Round⟫(산수문화, 2020.4.3.~26.)의 근심과 다정을 지나칠 수 없었다. 과학은 예술과 달리 유용하다고 전해지지만 블랙홀에 대한 앎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효용과 같은 유용함이 없는 자리에서도 헌신이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곳에 ‘의미’가 있는 까닭일 것이다. 과학과 예술이 동등해지는 순간이 전시에 있고, 우리의 외로움과 착각을 위해 ‘의미’와 동등한 블랙홀이 있는 순간이 전시에 있다. 화면에 블랙홀이 떴을 때,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정과 의미를 건네고 싶었던 나는 블랙홀이 떴다고 전화를 주고만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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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Go-Round⟫의 작업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그동안 진취적인 이들이 염려했었던 물신화fetishism에 가담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을 앗아가고, 개별성을 소거한 뒤 사물과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은, 물질적 진보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거나 보존하려고 했던 예술에게 늘 문제적이었다. 그러나 작업은 도리어 그 물신화의 가담자로 나선다. 작업에 등장하는 인간은 사물과 다르지 않다. 이 세계에서 커피를 뽑는 노동자가 움직이는 커피머신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작업 속의 과학자는 과학의 화신이거나 움직이는 식과 연산, 기구나 서적처럼 등장한다. 단 인간이 사물처럼 사용되거나 처분될 수 있기에 사물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물신화에 대한 가담은 사물이 정서와 의미와 동등해질 수 있듯, 그렇게 사물이 인간과 동등해질 수 있듯, 침략되거나 착취되고 교환되는 것에 불과한 그 이전의 사물로는 마침내 돌아갈 수 없다는 전제에서만 다다를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사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할 때, 전시는 사물을 해방하는 것을 통해 인간을 해방한다. 물신화에 대한 염려가 잠시 있었던 곳에 사물과의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실현된다.

블랙홀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기호들과 숫자들 그리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식과 연산들이라면 충분했을 것이다. 과학이 정말 그것만 전달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에어 스윙⟩에 담긴 과학자들은 그것만으로 블랙홀을 건네려고 하지 않는다. 말이 모자란 곳에서 시가 나서고 시가 모자란 곳에서 노래가 나서듯, 그리고 언어가 모자란 곳에서 이미지가 나서는 것처럼, 식과 연산들만으로는 부족하자 그들은 ‘연기’에 나서기로 한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식과 연산들에 한참을 못 미칠 손짓 그러니까 ‘스윙’이 있을 때, 작업은 그들이 전달하려는 것이 지식만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곳에는 어떤 마음으로서의 진심이 있고 지식을 초과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과학자는 과학을 전달하는 인간으로 화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블랙홀이라는 진심과 의미를 포개는 사물이 되려 한다. 그래서 화면에 담긴 것은 인간으로서의 과학자하고는 거리를 지녔다. 그들은 낯이 드러나지 않으며 말을 할 수도 없다. 낯과 말이 드러났다면 우리는 전달되는 지식에만 신경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낯과 말이 지워진 후에야, 어떻게서든 의미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애쓰고 바빴던 우리 과거의 손짓을, 사랑을 낯과 말없이 전달하려고 했던 인어공주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말을 잃어서야 그렇게 사물이 되어서야 침묵하지 않고 의미를 건넬 수 있게 된다.―그러나 이것은 과학이 말을 잃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과학은 처음부터 ‘말’이나 ‘사유(정신)’이 아닌 사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리-고-라운드⟩는 사물이 된 과학자들을 포함한 사물들의 연대이다. 전파망원경의 관측 과정을 따라가는 작업에는 화면에 담긴 기계와 기구뿐 아니라 전 지구별에 있는 사물들의 연대가 담기어 있다. 좀처럼 어슴푸레하게만 이해할 수 있는 스크린들이, 흐릿한 음정을 오가는 기계들이, 불규칙한 전선들의 도상들이, 말을 잃고 건반을 두드리는 인간-사물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연대해 있다. 각각의 부분이 하나의 결과를 위해서 기능을 담당한다 말하지는 말자. 각각의 사물은 처음부터 블랙홀을 관측하기 위하여 발명되거나 존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제작자)가 그것을 만들었을 때는 계획할 수 없었던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를 현신하고 다른 것들과 연대하고 있다. 과학자가 연구를 위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물들 역시 자신의 본질을 이탈하는 다른 책무에 참여하고 있다. 이로써 사물이 마치 인간과 같이 어떤 발화와 사유를 수행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근거가 마련된다. 인간의 영속적인 통제 아래에 있다는 사물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르게 사물은 제작과 탄생의 순간을 제외하고 어떤 목적에도 귀속되지 않고 문명 속에서 표류하거나 유영游泳한다. 그들의 존재론적 근거 역시 인간과 동등하게 ‘자유’에 있다. 혹은 더 나아가 인간이 새나 구름을 보고서야 자유를 도톰히 이해하듯이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출처는 사물에 있을지 모른다. 인간이 블랙홀을 관측하고자 사물들을 끌어모아 통제 아래에 둔 것이 아니라, 블랙홀의 의미에 닿기 위해서 그들은 표류하고 유영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치 화면의 몇 인간들이 우연히, 또 자유롭게 화면 속에 시설에 당도한 것처럼. 더군다나 뜻밖에 도착한 작가가 이 사물들의 연대를 만나 ⟨메리-고-라운드⟩라는 또 다른 연대에 이르게 될 때조차 본질이라 불렸던 것은 또다시 미끄러지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사물들이 그린 ⟨M87⟩을 볼 수 있다. 사물들의 연대의 결과라는 점에서 ⟨M87⟩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사물들의 목소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물들이 의미와 동등한 것이라면 이는 물리적으로 가장 순수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M87⟩은 사물로부터 나온 최초의 사물이자, 의미로부터 나온 순수의 의미이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라고 생각했다. 의미는 인간에게도 존재하지만 전달되기 위해서는 사물을 빌릴 수밖에 없을 때, 작가는 인간을 초과하는 것으로의 격상을 통해서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로 스스로를 낮추는 것을 통해 의미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이 사물이 되는 것으로만, 혹은 사물들의 연대에서만 순수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작업들을 쓸쓸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작업은 아직 꼭 맞는 의미를 건넬 수 없었던 드물지만 자주 있던 그런 존재들을 위하여, 착각 없이 외로운 이들을 위하여 작가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자신의 몫을 포기하고 헌신한 결과로 순수하게 의미만을 응결시킨 결정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물론 M87은 발견된 블랙홀의 이름이고, 작업은 그 블랙홀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상상해왔거나 실제로 관측된 눈으로 볼 수 있는 블랙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 역시 인간의 눈이 아니라 사물들의 눈을 빌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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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다. 느낌과 의미의 층위에서 모두는 타자다. 느낌과 의미 그 자체로는 어는 누구에게도 도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는 외롭다. 벗어날 수 없는, 면치 못할 외로움을 우리는 곧잘 ‘근원적 고독’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이 모두를 외로운 대로 방치하거나 방조하거나 또 종용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어차피 외로울 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인간은 착각이라도 건네어 본다. 그리고 건네기 위해 사물들을 빌린다. 사물들을 빌리며 언젠가 도달할 줄 바라본다. 의미가 사물과 같다는 것이 서글픈 것은 의미가 사물로 격하된다는 것에서 기인한 서글픔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미가 그 자체로는 건네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설움이다. 대신에 사물이 있다. 근원적 고독을 해소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잠시나마 착각으로 이끌 사물이 다행스럽게도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의미를 건넬, 스스로의 의미와 동등한 사물을 찾지 못한 이들이, 아직 착각 없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타자의 타자일 것이다. 이의록은 이들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처에 있는 사물로는 의미를 건넬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가장 멀리 있는 사물을, 가장 보이지 않았던 사물을 그러니까 가장 소외된 사물을 찾아내야 했다.

앞장 서있는 타자를 환대하고 그를 무리에 합류시키는 것은 정치나 윤리의 몫일 줄 안다. 그러나 결국 환대받지 못하거나 무리에 합류될 수 없을 마지막까지 타자인 이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울 수 있는 것은, 마지막까지 울어야하는 몫은 비로소 예술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 한다. “어두운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은 우리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들이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만들어졌다. 볼 수 없고, 가닿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침묵으로부터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우주를 본다는 것은 과거를 본다는 것과 같다.” 전시 서문에 적힌 이의록의 이 네 문장에 잠겨야 했다, 이 문장의 어떤 일부도 식지 않도록. 전하거나 건네 받으려는 의미가 지금에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상상”이 필요해지고 “신화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가닿지 못하는 세계”의 다른 말은 마지막까지 타자인 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과 “신화와 이야기”란 가설은 “가닿지 못하는” 타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닿지 못해 타자인 이를 인간과 사물로 구분하지 않는다면 이때 과학과 예술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의록이 “원하는 상의 근사치에 도달하는 것은 시행착오와 시대착오의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라는 문장을 건네자 조금은 다른 줄도 알게 되었다. 과학은 진실의 수호자이겠지만 예술은 기꺼이 가설의 선동가이다. 과학은 예술과 함께 “상상”으로써 출발하면서도 “신화와 이야기”를 어디선가 포기할 테지만 예술은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근원적 고독을 면치 못한다 하더라도 착각에 헌신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블랙홀 M87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있는지, 어떤 모습인지를 알 수 없었던 사물이다. 착각 없이 외로운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이 품고 있는 느낌과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 주변의 누구도 그것들이 어떻게 있는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어 그들은 외로운 채로 남았다. M87의 발견은 마지막까지 타자로 남은 이들을 위한 발견이고, 마지막까지 외로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사물이다. 전시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타자일, 마지막까지 외로움을 겪을 이들을 위해 있었다. 건넬 수 없어 진심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말 없는 이야기로 남았던 5500만 년의 진심을 전시는 그렇게 증명한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린다. 5500만 년이나 참았던 진심을, 블랙홀이 떴다고.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시각예술분야 평가에 부친 글

자- 변신이다_임동승: TRANS

임동승, 「변신」, Oil on canvas, 2018

비록 얼어붙고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간에 존재를 흘려보내려는 것이 또 공간으로 발하려 하는 것이 있다. 동그라미가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시간도 공간도 갖지 않은 셈이지만, ‘일정점을 원점으로 하여 평면상을 회전하는 폐곡선’을 뜻한다면 그것은 어느새 시공간 안을 흐르고 차지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머리가 꼬리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식별이 불가능하도록 빠르게 회전하는 까닭이다. 비명도 발작도 없이 정지된 평면만이 강조된 것이 그림의 본질이나 운명이라고 전하는 것은, 임동승이 말한 “영화적인 면모, 강점이 회화의 영역에서 비본질적이고 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 시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따르는 것이란 양자의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은 과녁을 빗나간다. “무엇을 그려야 하고 무엇을 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누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가 없어졌다. 정지의 결정이 발생을 가능하게 만들고, 발생을 결정한 곳에서 정지가 증식된다. 그러니 그리는 자가 이제 해야 할 것은 그것에 “항상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 이후에 나서는 것이다. 임동승의 《TRANS》는 어느 입장을 선택하든지, 결국 반대의 선택의 책무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 조재연

(『월간미술』 2020년 5월 제424호에서 계속)

0章_샌정: VERY ART

샌정, 「Untitled」, Oil on canvas, 162x260cm, 2019

부분과 차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고, ‘차이’를 가진 것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된다. 애틋한 우리는 존중과 인정 말고는 할 것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때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부분은 부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닿는 운명을 지닌 것이고, 가치와 의미는 한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지역 그리고 시간의 차이마저 따돌리는 보편적인 필연을 지닌 것이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오랫동안 서성이는 인간처럼 예술도 그렇게 잦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역시 이제는 ‘세상은 이렇다’고 자신 있게 얼버무리는 대신에 ‘내가 보는 세상의 부분은 이렇다’고 또박였고, 누구나 함께 앓고 있는 히스테리 대신에 스스로의 신경증을 진술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예술은 ‘어떤 것에 대한’ 예술,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예술 혹은 ‘나의・내게 예술’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부분으로 한정 짓는 선에서 정확하다고 믿는 시간을 인간과 함께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그저 ‘예술’이라고 이름 짓는 예술이 나섰을 때, 그리고 한 도시의 짧은 시간을 겨우 머물다 떠날 유한한 존재가 이 모든 부분과 유한함을 부정하고, 전 지구별에서 스스로는 어디에나 있으며 어느 때나 있다면서 어떤 수식어구와 한정어구도 소거하고 그저 ‘예술’로 나설 때, 나는 휘청했다. 샌정의 ⟪VERY ART⟫는 ‘어떤’ 예술만이 존재하려는 세상에서, 예술’만(very)’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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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_정원석: 할아버지 시계

정원석, 『할아버지의 시계』, 별관, 2020.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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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하게와 물끄러미가 어긋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었다. 열지 않는 서랍 속의 드물게 남는 사진처럼 사랑도 무수히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한심한 반복들을 고작 잊고선 지나간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병을 앓을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원을 부정할 그 말이 준비된 것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영원’이란 낱말이 고비를 맞았던 것은 ‘영원’을 영원으로 맞이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영원은 영원을 지지하고 믿음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부정하고 의심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상징을 다이아몬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손쉽게 모든 사물에 함부로 부딪쳐 보고 떨어진 파편에 당혹감을 느끼지마는, 사랑을 대추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좀처럼 부서질 것을 알기에 감사하고 조심히 안는다. 현명한 자들과 믿음 있는 자들이 모두 틀려 사랑이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해도, 여전함으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지 못해 떨고 있던 자들의 몫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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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알러지 잠수함_김학량: 바다와 나비

김학량, ⟪바다와 나비⟫ 전시 포스터, 상업화랑, 2020.2.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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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세상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다음에’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럼 나는 시계 앞으로 가, 시곗바늘만 빤하게 쳐다보았다. 째깍째깍 뚝뚝 끊어지며 가는 초침보다는 친구 집에서 본 부드럽게 움직이는 초침의 시계가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그런 시계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 그는 부끄러워서 다음 시간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나이였고, 누군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평소에 눈감고 하던 것들도 실수했었기에 그가 부드럽게 침들을 옮기지 못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침이 한 바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그가 안심하고 바늘을 옮길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것은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하는 유형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부끄럼 많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이란 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나는 한동안 우리 집에 누구도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직전에는 시계를 보지 못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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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게 허무라니요_서찬석: 오류를 지나

서찬석, 『오류를 지나』 전시 포스터, 보안여관, 2020.2.1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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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기울이다 결국 불에 닿은 것처럼 혹은 누가 모르게 얼음을 등 뒤에 넣은 것처럼 느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따위의 말을 들을 때면.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의미에 관해 묻곤 했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화폐를 벌 수 있는지와 어느 정도의 쓸모를 가질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아주 상냥한 물음에 속한 것이었고, 좁은 내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것 같았지만, 등은 이따금 시큰함을 느꼈다. 세상엔 생각보다 화폐를 따지는 물음만큼 의미를 따지는 이들이 존재했다. 아마도 세상을 좀 더 정숙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은 철학자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와 의미는 얼마만큼이나 다를까. 한동안 의미는 화폐를 대적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사코, 그것도 자발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단절한 우리 근대인이 화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세상의 효용으로는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다시 너절한 초월적인 것들을 애끓듯 뒤적였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여럿은 적은 화폐나 드물은 효용에도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했다. 의미는 화폐를 대적했던 것이 아니라 적은 화폐를 쥐여주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화폐가 좀처럼 부재하는 자리에 대한 알리바이를 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필요한 것이지만 감히 화폐를 쥐여주기는 싫었던 세상이 알리바이처럼 건네던 것이 사실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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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보는 법_존버거: 몇 시인가요?

존 버거 글, 셀축 데미렐 그림, 신혜경 옮김, 『몇시인가요?』, 열화당, 2019

저마다 시계를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시간을 묻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드물게만 물으면서도 지금이 몇 시인지・오늘이 며칠인지 이따금씩 자주 묻곤 했던 때와 오늘은 다르다. “몇 시인가요?”는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왔고, 그 대답은 물음하는 자라면 늘 필요한 것이면서도 정확한 답이었다. 사회라는 낱말이 함께 살아가는 여럿을 묶는 일종의 상상적 지평일 때, 시간을 묻는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동시에 있는지, 즉 함께 있는지 혹은 함께하는지를 그때그때 확인하는 징후적인 암구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묻지 않는 우리는 이제 함께하지 않거나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도착한 것일 테다. 반대로 스스로 “몇 시”를 도처에서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몇 시”인지 물음을 재촉하는 자는 지금 주어진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찾는 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그저 ‘여럿임’에 ‘함께’라는 부사를 붙이려 하거나, 그런 지평을 만드는 데 헌신하려 하는 이기도 할 것이다. / 조재연

(『월간미술』 2020년 2월 제421호에서 계속)

시계판에 총_구나: 너와나와너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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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타임 세일이라는 행사 속에 종사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소실하는 일은 ‘지금’이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의 항 사이에서 도려낼 때 야기된다. 시간은 모순적인 관계항에 달려있는 것이다. 현재를 따로 도려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연연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하긴커녕 시간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에 연루하게 된다. 과거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어떤 사건의 이후’—80년 5월 이후나 14년 4월 이후와 같은—라는 기준점을 가지고 그러한 과거에 대한 부정과 지양이라는 관계에서 위치한다. 반면 미래를 염두에 놓을 때 ‘지금’은 현재에 존재해야 했으나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을 위한 시간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지양을 수행하는 관계에 놓인다. 결국 과거와 미래라는 항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지금의 세계가 과거와는 달랐고 또 미래에 역시 달라질 것이란 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견지하는 일이며, 존재에게는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는 것에 믿음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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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끔 서 있어도 우리들은_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

Happy Hour, 「ruoh yp pah(어슬렁어슬렁)」, 사진출처

’세계를 바꾸려면’이란 조건절을 내달은 문장들은 지금 진부해졌다. 이 조건절을 만족시키기 위해 던졌던 물음에 이윽고 ‘세계란 없습니다’하고 수긍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긍으로부터 가장 위기에 닥뜨린 것은 존재 자체이기보단 예술일지도 모른다. 이때 예술이란 인상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진실한 세계란 이렇다고 호령하며 세계를 규정짓던 것이자, 과거의 세계에는 없을 수밖에 없으나 미래에 도래해야만 할 것을 당기는 것으로, ‘지금’ 세계의 불충분함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상상력을 행사하던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전체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사소한 부분의 장소들을 종용하고 있으며, 세계에 관한 입장을 지니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입장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반대로 예술이 가능하기 위해서 예술이 할 것은 세계의 부분들을 상냥하게 포착하고 위무하기보다는 스리슬쩍 소실된 세계를 다시 창설하는 일에 나서는 것 아닐까. 그런 한에서 ⟪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는 감각이 연결될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창설하는 데 모든 주의와 신경을 기울이는 기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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