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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난 흰 이빨 자욱, 부풀어 오르는 비눗방울, 밤하늘의 검은 너울, 유리의 거미줄. 달빛인지 햇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그저 여울지 못한 창백한 조명 아래, 여윈 너의 팔과 다리를 비유할 낱말을 발음해 본다. 분명 획 하나를 제외한 모든 면에 얽힌 거대한 무게를 생략해 버린 당신은, 이 순간 가장 엷고 얇다. 나는 횡행한 없는 것들을 모아 부르고 싶어졌다가, 쉽게 ‘폐허’를 모색하는 감동에는 어떤 상투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째서 풍경의 부재는 새삼스럽게 죽어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밀려가는 것일까. ‘부재’와 ‘폐허’. 나는 이런 감정과 태도를 의미하는 단어를 조금 노려본다.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이 순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폐허라 말하지 않겠다. 하늘을 그리지 않아도 형상만으로 빛이 있음을 알고, 다음 장면을 볼 수 없으면서도 그림자로 시간이 줄어드는 줄 알며, 길을 그리지 않아도 문이 존재하므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맙소사 나는 무엇이든 이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카테고리:] 문단들
『비평웹진 퐁』 인터뷰_tunainforest: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아래는 tunainforest가 비평웹진 퐁에서 기획한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 중에서 필자의 답을 모은 글이다. 본 기획에는 미술, 만화, 영화, 음악 각 분야의 비평가가 참여했다.
tunainforest (이하 T)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재연 (이하 J) 아마도 이런 대답은 아둔한 편에 속하겠지요? 저는 이미 몇 편의 문장들을 쓰고 난 후에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또 마음에 둔 일이 ‘글쓰기’임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첫 글을 어떤 연유에서 썼는지에 대해서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계속 쓰는 이유라면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글을 쓰게 된 이유와 다르지 않길 바라봅니다.
독을 차고_안민: Con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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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버지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이야기,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일, 한 사람의 마음엔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보는 일, 그리고 사랑이 죽음으로써 끝난다 해도 사랑의 주검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오래전 내가 읽은 체, 알은 체하고 눈 돌렸던 모든 장면들이 시간도 장소도 심지어 기억도 없이 살아와 끝내 희망을 선물한다. 나는 올 한 해 울지 않았기에 선물을 받는 것이겠지.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순응하고 타협했다는 말과 다른 점이 없지 않을까. 나의 절망을 남에게도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그것을 희망이란 그럴싸한 말로써 그저 삼킨.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도, 엄격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끝끝내 당신을 미워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나. 그러니 내가 예찬해야 할 대상은 이제 부정적인 것들이다. 더는 희망을 찾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해를 찾지 않으면서 절망과 미움으로써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벗은 그 무서운 독을 그만 흩어버리라 하겠지만,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며, 독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보는 일에 나선다. 예술의 한편은 다시 그곳에 종사하려 한다.
흐린 날, 미사일_차지량: New Home – Stay
나는 문득 자수를 하고 싶어진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장마철마다 대야와 바가지로 물을 푸던 양친을 잊고 지냄에 대하여, 익지도 않은 낯선 짐승을 뼈째로 허겁지겁 삼키고는 그 비가 타고 내려오던 깊은 계단에 게워냈던 기억의 부재에 대하여, 새벽 내 심장 타는 냄새를 맡던 가족의 얼굴을 모름에 대하여, 그러니까 그 어느 것도 내가 머물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집에만 가져오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지. 쥐기 위해서 꺾어야 한다는 것과,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만은 가구로 재현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누구를 사랑하는 태도가 사실 끔찍하게 다르다 것이 내가 그곳을 기억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 누군가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갈 스스로 생성해내는 생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밤이나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오일 대신 유채라 발음하고, 시침은 물론 형광등이 씨끄럽다는 것을 앎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이 사소한 소리들을 말미암아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집으로 가는 길마저 망각할 수밖에. 흐린 날, 미사일_차지량: New Home – Stay 더보기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_이현수: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EVERGREEN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 마이클 타이슨, 1987년 8월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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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관한 모든 지혜를 얻었기에, 쌓아 올린 그 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결별을 짓는다.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창피한 것을 동시에 나눈 우리는 이다음에 무엇을 남기게 될지 이제 알고 있다. 서로의 가장 헌신적인 것과 가장 추한 것을 교환해온 지금. 그리고 나는 네게 마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대로 너는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충분히 노력했던 지금. 포말은 모래 위에 새겼던 모든 낱말을 이치가 예정했던 대로 지울 것이다. 잡고 있는 것보다 놓아주는 데 더 큰마음과 지혜가 필요하다지. 실험, 경험, 증명, 검토 그리고 결론까지, 시작점에는 탄생하지 않았던 현명함은 엇갈릴 이 날을 위해 이다지도 적재되어왔을까. 그러나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성숙해지기 전, 사랑의 시작점에서 영원을 기약했던 순간과 새 삶의 출발점에서 혁명의 꿈에 젖었던 순간이다. 원대하고 급진적인 사유는 오직 성숙이 부재한 순간에 존재하고 맒을 천천히 깨닫고 있다. 결실 맺는 사랑과 도래할 혁명은 미래에 있다지만, 어찌하여 이룩과 번성은 그것으로부터 멀어짐을 만드는 것일까. 또 출발하지도 않은 채로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고 마는 것일까. 시간을 거듭할 때 생기는 지혜가 무언갈 내려놓게 만든다면 차라리 걸음을 어리석음에 향하도록 돌린다. 거칠고, 미성숙하고, 비이성적이며, 비발전된 ‘시작’으로 돌아가 다시 네게 무엇을 ‘고백’하려 한다.
네 입속에 내 잎_하므음: 종이 속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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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부르는 표정. 당신도 한 번쯤은 부르거나 대답해본 적이 있겠지. 당신이 나의 표정을 읽고 나는 혀로써 당신이 읽은 것이 맞다 대답하는. 내 과거를 대신 기억하는 안색에 대해, 내 슬픔을 대신 앓는 낯빛에 대해, 나 대신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얼굴에 대해 그러니까 대신하여 어떤 소리를 기다리는 표정에 대하여. 이들을 마주친다면 나는 비로소 고백할 준비가 끝날지 모르겠다. 괜찮냐, 어떻냐는 물음이 마치 열쇠가 되어서 그 열쇠에 꼭 맞는 말을 발음하는 일도 있지만, 그 표정들은 물음 없이 도착해 나는 그것에 맞는 어떤 소리를 뱉고 또 발음할 준비를 마치고 만다. 건네는 대화 안에서 몇 개의 말이 겨우 남을까 하는 고민. 그러나 그 열쇠를 통해 소리가 당신의 안으로 안착한다면, 굳이 구석진 자리에 앉지 않아도 또 천천히만 식는 커피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언어의 온도가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다. 고백을 하고 밤사이 뒤척였던 것은 당신의 입에서 ‘아니’란 말이 나올까보다는, 내가 두드린 계이름과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네 입속에 내 잎을 넣어 그것이 자라나고 흔들리는 순간 염려는 없었다.
생, 나는 닿지 않는 등_정의철: Look at me now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대리언 리더, 배성민 옮김, 『광기』, 까치,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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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에는 얼굴이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하루엔 낯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이 장기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사물을 통과한 사실과 장소는 자욱으로 남아 언제든 돌이켜볼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건넨 낯은 도무지 잔류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커피 머신과 졸음을 참을 줄 아는 포스기, 그들처럼 살과 피를 가진 기계들. 인형人形 없이 운영되는 가게는 조금도 새롭지 않다.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는 인사에 이제 모두가 물음표를 떼었듯이, 혹은 녹음에 부친 인사에 대꾸가 허무한 것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파문엔 서로의 주름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이따금 당신이 달라진 게 없냐며 모습 중 어디가 변하였는지를 물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지난날과 오늘을 대차대조할 노력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도, 예민한 관찰력을 지니지 않은 연유도 아니었다. 그 물음만이 얼굴을 분실한 세계를 떠올리게 만들어, 상실의 죄책을 상기시킨다. 얼굴은 신체의 마중물이니 낯의 탈거奪去는 신체의 탈거. 그때마다 넉넉하지 않은 입을 벌린 사물들이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너도 사물이지, 너도 사물이지 하면서.
그다음 누구도 비웃지 않게 된다_정희영: 짐승에 이르기를
경고문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당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당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 G.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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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약하다고 외칠 수는 없을까, 각자의 강함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투사처럼 굽히지 않는 의지로 세상을 변혁하는 이야기를 나는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세계를 몇 개의 명제로 단호하게 진단하고, 적을 규탄하는 위대한 일은 내게 할당되지 못한다. 내 생김새는 오랫동안 비겁하고 비천하다. 광장의 절정 위에서 나는 늘 비켜서 있었다. 누군가 밀치기도 전에 인도에 먼저 올랐던 그리고 매쓰거운 분무를 몇 분 버티지도 않던 나는 궐련 어느 쪽에 입을 맞추어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내 자격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내 몸도 타인의 물건도 숨기는 데 익숙한 내 앞은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그래서 무언가 쓸 때마다 나는 늘 에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우회에도 애써 걷는 까닭은 비겁은 차치하더라도 비천으로 구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단 절박함에서였다. 고귀하고 완고함이란 조금도 없는 천함과 미약에서 길어낼 답이 어딘가엔 존재한다는 것. 외려 강함을 서로 앞다투어 외치는 이들이 초래한 세상에서 오직 미력으로써 발견할 가치가 있다는 것. 이 멍에 같은 희망을 뿌리칠 길은 없었다. 그러니 비겁함 때문에 내가 아니어도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우리의 죄는 희망_김연재, 유지원: 아포칼립스 모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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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랑이 더 아름답다 그리는 병을 앓는 우리. 그럼에도 끝까지 당신을 미워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잔인한 기억 사이사이에 고운 말이 떠오르고, 용서 못 할 사건을 기어이 가볍게 만들 미련이 자라날 때면 과거는 도무지 다정을 면치 못했다. 받은 상처로 결별을 짓기보다는 다하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희망을 이룩한다. 이 미력한 희망이 남아 ‘미래‘는 쉬이 연기된다. 만약에 좀 더 성숙해진 채로 우리가 다시 만나고, 만약에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며, 만약에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결론이 과연 다를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무결한 환상을 지탱하는 지지체 ‘만약에‘는, 어떤 노도怒濤도 우릴 미래로 끌고 가지 않도록 지켜준다.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가리켰던 미래라는 낱말의 신세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처량해지고 말았다.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진흙 위에서 무구한 것이 피어나거나 검은 비닐봉지조차 가끔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를 쏟아내는 일이 여전히 있는 세상.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하루 또 하루 희망을 발견하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불을 꺼 잠에서 깨는 일_박지형: 멀고도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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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밤, 밤으로 가야 한다.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둠 안에 있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필요했던 일종의 것들을 빛을 통해 알아채 왔을 테지만, 형편에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빛은 어떤 시간이 흘러도 은닉이나 유예도 없이, 외려 은닉이나 유예를 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무지를 유지시켰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면 빛은 어떤 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빛은 이것에 합의를 초과한 어떤 사용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지나왔던 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양초란 그저 실내에 있어야 한다거나, 교통 공간은 교통 공간일 뿐이니 이곳으로 집단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일은 모두 빛으로부터의 식별에서 야기된다. 그러나 불을 꺼 눈을 잃자, 부딪치지 않던 것들과 부닥치게 된다. 거닐지 않을 곳에서 걷게 되고, 붙잡지 않을 것을 붙잡게 된다. 은밀해지려는 부빔은 이제 가능하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