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0일 서울시는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를 결정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시민위원회를 결성해 수차례의 회의를 모았고, 인권헌장의 내용 역시 특이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연역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권헌장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소통·합의의 부재의 반증으로 이해한 것에서 발생했다. 민주주의의 정치란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는 정치이기에 반대가 격렬하다면 그것은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추진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므로 재고하여 충분한 소통과 합의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은 그자체로 민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 찝찝한 일이고 분통스런 느낌 또한 제공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영화 <당통>이 표상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카테고리:] 미술 아닌 것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어둠의 심연>은 진보적인 작품이다. 문명의 저편에 존재하는 어둠의 심연을 찾아 떠나는 말로우의 여정 속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위선과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은 철저하게 고발되며, 근대 유럽의 문명이 낳았다고 표현되는 ‘위대한’ 커츠 대령의 어둠과 동화되어 변태된 모습은 유럽 식민주의가 은폐하는 문명의 이중성과 야만을 반성하게 한다. 소설이 갖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과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근대를 지탱하고 추동시켜온 계몽정신-이성-의 야만성을 드러낸 이러한 전복적 시도들은 작품의 진보성을 입증시키는 데 성공한다. 분명 소설은 당대 어느 문학에서도 찾을 수 없는 비판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둠의 심연>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콘래드는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1975년 나이지리아의 유명 비평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로부터 소설의 진보성은 추락한다. 아체베의 비평 속에서 콘래드는 당대의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여전히 그가 발붙이고 있는 지면은 식민사관임이, 여전히 그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노출된다. 그가 백인 여성을 대상으로 “애도 중이었다.”라든지 “성숙한 충정과 신뢰 그리 언어의 배반 -조지프 콘래드 비평으로부터 더보기
느낌의 거리_문학의 이유
이해한다는 말은 애초에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말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말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내가 너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는 다행스러운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같아 질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의 간극만큼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못한다”라는 문법이 존재하고, 그 간극에 실례를 구하며 이해를 ‘양해’라는 말로 고쳐쓰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너와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네가 나같아 질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그래서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려하거나, 상대를 나에 비추어 평가하려고 한다. 이 망각은 단순히 너와 내가 다르다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 망각은 처음부터 ‘이해한다는 말’과 ‘같아진다는 말’의 목적지가 행동이 아니라 느낌을 향해있기 때문에, 그러나 늘 행동을 향해 걷고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진보의 솔로몬 병
“본인이 굉장히 현명하고 중립적인 듯 포장하여, 누가 봐도 한쪽이 잘못한 일을 양쪽 다 똑같다고 말하며 양쪽의 잘못을 인정하는 쿨함, 냉철한 두뇌를 가진 척 하는 병”은 리그베다 위키백과에 수록된 인터넷 신조어 솔로몬병의 정의다. 이 신조어를 접한 것은 한 친구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인데, 그때 친구는 연인 관계에서의 솔로몬 병에 걸린 ‘연인’이 얼마나 비극을 야기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령 이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