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붉은 시상식 레드 어워드. 우리는 세계를 상상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다시’ 바꿔 놓은 예술, 세계의 부정을 넘어 자본과 맞서고자 하는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과 함께 투쟁하는 예술을 매년 기다려 왔다. 그렇기에 레드 어워드 수상작의 면면은 당대의 불투명한 전선을 인식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수상작을 보면 우리가 무엇과 싸워왔는지, 무엇을 위해 어깨를 걸어야 하는지가 보였다. 작년엔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파업이 쏘아 올린 비정규직, 하청 노동이 최대 의제로 번졌고, 2021년엔 여성, 노동자, 이주민의 등 사회적 타자의 투쟁을 역사화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 진실과 다퉈야만 했던 포스트트루스 시대가 쟁점이 됐다.
[카테고리:] 미술 아닌 것
너의 나_『Flou』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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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 놓았겠지. 너는 무인도에서 출발한 코르크 병처럼 눈을 감고 하루 종일 작은 밀썰물의 애무를 느낀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바다는 늘 자신을 향하여 흐르기에, 너는 출발하지 않고서 도달하고, 도착하지 않은 채 떠난다. 부서진 차, 손에 묻은 피, 젖은 신발 그리고 오발 혹은 불발을 예정한 권총 한 자루…. 이다지도 무겁고 끈적이는 운명을 두고 너는 지난 일과 결별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다. 너는 늘 한가운데서 비롯해야만 한다. 한가운데. 뜨고 지는 영원한 자맥질을 통해 네가 알게 된 것은 바다의 너비가 아니라 고락高落이다. 기어이 너를 살리겠다는 것인지, 이냥 묻어버리겠다는 것인지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갈 때, 결국 너는 생이란 어딘가 닿는 것이 아니라 체념과 기대를 반복하며 파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마음 중 어느 하나에 의지해 살 수는 없다. 멀어져서도 가라앉아도 안 되기에 너는 그저 두 마음의 오고 감을 도리 없이 들여다본다.
『비평웹진 퐁』 인터뷰_tunainforest: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아래는 tunainforest가 비평웹진 퐁에서 기획한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 중에서 필자의 답을 모은 글이다. 본 기획에는 미술, 만화, 영화, 음악 각 분야의 비평가가 참여했다.
tunainforest (이하 T)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재연 (이하 J) 아마도 이런 대답은 아둔한 편에 속하겠지요? 저는 이미 몇 편의 문장들을 쓰고 난 후에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또 마음에 둔 일이 ‘글쓰기’임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첫 글을 어떤 연유에서 썼는지에 대해서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계속 쓰는 이유라면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글을 쓰게 된 이유와 다르지 않길 바라봅니다.
생쥐와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다_유태영: 그날,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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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몽상을 했다.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 훼방을 놓았던 그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렇게 했거나 하지 않았더라면. 이쪽을 선택하는 대신에 저쪽을 선택했더라면. 그리고 그 시점에서 물러났더라면. ‘만약’의 층위는 나를 꼴사납도록 만드는 노도치는 이 생에 애달피 움켜쥘 수 있는 닻이 되어준다. 그러나 한사코 나는 결과 앞으로 흘러와 그것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깊은 고민이 만든 일이었든, 얕은 생각이 주선한 일이었든 돌이켜보면 어떤 순간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는 일은 드물었다. 단 하나의 선택이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은 ‘사실’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건은 ‘그냥’, ‘원래’ 일어난다. 아무리 추하고 악취가 풍긴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곱씹으며 음미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찌뿌둥함과 질척함을 느끼는 이 몸에서 ‘연속’해야 한다.
시계 보는 법_존버거: 몇 시인가요?
저마다 시계를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시간을 묻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드물게만 물으면서도 지금이 몇 시인지・오늘이 며칠인지 이따금씩 자주 묻곤 했던 때와 오늘은 다르다. “몇 시인가요?”는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왔고, 그 대답은 물음하는 자라면 늘 필요한 것이면서도 정확한 답이었다. 사회라는 낱말이 함께 살아가는 여럿을 묶는 일종의 상상적 지평일 때, 시간을 묻는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동시에 있는지, 즉 함께 있는지 혹은 함께하는지를 그때그때 확인하는 징후적인 암구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묻지 않는 우리는 이제 함께하지 않거나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도착한 것일 테다. 반대로 스스로 “몇 시”를 도처에서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몇 시”인지 물음을 재촉하는 자는 지금 주어진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찾는 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그저 ‘여럿임’에 ‘함께’라는 부사를 붙이려 하거나, 그런 지평을 만드는 데 헌신하려 하는 이기도 할 것이다. / 조재연
영원히 영원을 포기하지 않기_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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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을 해결해주는 데 늘 주선에 나섰던 변증법도 죄의 부피를 구할 순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지 모른다. 이별을 지으면서 나는, 늘 그 말에 가책받아야만 했다. 그때의 말이 거짓이었냐는 상대의 추궁 앞에서 대꾸는 항상 주춤거렸다. 그 추궁에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그때는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하고 싶었지만, 아뿔싸 ‘그때’라는 말과 ‘영원’이라는 말은 도통 섞이지 않았다. 영원이란 것은 결국 순간의 진심을 무척 강조하기 위해서 ‘너무’라는 부사를 갈음하고자 등장한 수사에 불과했을까. 인간은 다른 사람과 살아가기 전에 스스로와 살아가야 한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이란 말을 꺼냈을 때, 스스로에 대하여 전부 파악할 수 없을 작은 신체가 진심이란 말을 꺼냈을 때, 그 말은 인간에게 영원이란 개념으로 할당된 ‘영혼’을, 그리고 실재라는 개념으로 할당된 ‘생’을 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혼과 생을 건넨 말이 거짓이라면 그땐 정말 ‘나’와 살아가기가 힘들었고, ‘나’로 살아가기가 힘이 들었다.
아니라고 하는데 괜찮다고 말하네_자크 랑시에르, 『아이스테시스』의 민중 그리고 심미화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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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고 어리석게 말하자면, 민중은 변혁에 있어서 최초심最初審이 아니다. 예심 내지 최초심에서 늘 먼저 등장한 것은 지식인, 엘리트와 같은 몫 있는 자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레닌과 마오가 그랬다. 최초심에서 가장 먼저 세계를 고발하고 소장을 전달하는 것은, 민중의 몫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송사가 진행되고 비로소 그것의 효력을 확정시킬 최종심을 담당하는 것은 늘 민중이었다. 민중을 적으로 돌렸을 때 프랑스혁명은 기각되었고,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목표가 민중을 폭력과 극단으로 내몰았을 때 공산주의는 두 번째 심을 통과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변혁에 있어서 최종심급은 민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란, 몫 있는 자들이 주창하는 그것의 이론적 완성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생산하게 될 주체, 즉 민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니라고 하는데 괜찮다고 말하네_자크 랑시에르, 『아이스테시스』의 민중 그리고 심미화 의혹 더보기
유감하는 미학_파레르곤과 이코노미메시스 이래로 칸트 ‘미학’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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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큼 많은 소설, 전시, 공연, 음악 등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미’ 많은 시가 쓰여졌고, 많은 노래들이 불려지고 그리고 많은 전시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술가들은 차고 넘치고 또 생성되며, 예술에 유례없는 화폐가 삽입된다. 아 이거슨 인류 역사에는 절대 없었던 존나 아름다운 세계다. 그리고 비로소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요구하고 명령하지만, 동시에 세계는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든지 충분하게 존재할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세계가 아닐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힘도 절대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가봐, 빈 밤에 기억이 와있어_단식광대: 새벽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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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본적(本籍)은 아마도 시(詩)겠지만, 노래가 기어코 시에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택한 그것은,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는 읽는 이의 시각과 정신을 온전히 소유해 제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 의미에 어렵사리 도달하게 만들지만, 노래는 듣는 이의 청각과 정신을 제압하지 않으면서도, 듣는 이가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함께 듣든 무엇을 행위하든 상관없이,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노래의 몫을 다한다. 다시 말해서, 노래는 배경 음악의 쓰임새처럼 소리를 전달하면서도 다른 소리를 빼앗지 않고, 다른 감각과 행위·정신에 공유와 연대에만 종사하는 ‘사적 소유’의 해방을 앞서 담지한다. 그리고 이점은 시와의 결별 이후의 노래가 겪은 성숙이면서도 또한 거의 모든 예술과의 차별됨이라는 점에서 노래가 가진 본질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_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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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고인석에 앉았고 곧 판사가 들어온다. 이제 재판은 시작된다. 그런데 판사가 기침을 참기 위해 수건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뿔싸, 판사가 감기에 걸렸던가. 이번엔 판사가 배를 어루만진다. 젠장, 판사는 오늘 점심을 거른 것 같다. 그는 재빨리 그의 변호인에게 속삭였다. 판사는 독감에 걸린 게 틀림없으며, 저 꾀죄죄한 피부를 보니 잠도 못 잤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입맛이 없어 점심까지 걸렀을 것이 분명하다. 독감에 걸리고 점심도 안 챙겨 먹은 판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니 혹시 몸은 괜찮은지, 점심은 드셨는지 물어보라. 변호인은 애써 그의 고객을 진정시켰지만, 결국 그는 그의 예상대로 재판에서 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의로운 법 집행을 위해서 모든 율사(律士)는 재판마다 건강검진과 수면 체크와 의무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기로.
그리고 세계에서 겨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판사를 사적인 생활을 가지며 식사와 건강 따위를 걱정해야 하는 실존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 존재는 우리에게 걸어 다니는 법전이거나 기껏해야 숨을 쉬는 법의 화신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커피숍의 알바생은 걸어 다니는 커피 머신일 뿐이며 은행 창구 직원은 숨을 쉬는 ATM기 등등으로, 우리에게 인간은 그저 살아있는 사물로 현상(現像)된다. 우리는 그 사물에 엔간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세계는 유지되며 우린 그렇게 유지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건강과 식사를 점검하는 불필요한 물음과 의심을 두고 살아야 할 테니, 효용과 효율이 미덕인 세계에서 이는 허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