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미술, 사물 스스로 그린: 게리 코마린

게리 코마린, 〈Cake, Stacked, Green on Blue〉 캔버스에 에나멜 패인트, 수채 129×120.5cm 2022

내 그림은 사전 구상 없이 진행된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린다. 가장 훌륭한 그림은 가장 많이 실패한 그림이다. 그림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화가인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때, 바로 좋은 상태이다. 나의 목표는 그림이 스스로 그려지는 것이다. ― 개리 코마린

개리 코마린(Gary Komarin)은 사물의 잊혀진 얼굴을 그린다. 그가 풍경에서 대상 사이의 고리를 풀어내고 느슨한 자욱만을 비출 때, 그리고 오브제의 섬세한 겹 대신 앙상한 윤곽으로서 그 낯만을 드러낼 때, 우리는 사물이 어떤 얼굴을 띄었는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대다수의 화가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그러나 그런 그림은 아름다움만을 간신히 거느릴 뿐 진실을 담지 못한다. 코마린 회화의 매혹은 그가 대상을 모른다고 말하는 데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을 포착했고 느꼈으며 그렸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고백. 누군가 예술이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을 때, 코마린은 예술이 진실을 표현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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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정거장_2023 대구권 미술대 연합전 PLATFORM

2023 대구권 미술대학 연합전 《PLATFORM》(기획: 박천)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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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의 작가와 그들을 엮은 18개 주제전. 대규모 전시를 정거장(platform)에 빗대는 것은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키워드로는 도무지 꿰뚫을 수 없는 저마다의 풍경이 있고, 각자의 목적지를 지닌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장소에서 플랫폼보다 더 나은 비유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 이들을 싣고 나르는 ‘기차’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곳이 그저 꾸러미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1850년에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는 명제를 제시했고, 3년 뒤 미셸 슈발리에는 철도 건설을 “몇 세기 전의 교회 건축에 비견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잔 벅모스는 이 시기를 “철도는 지시물이었고 진보는 기호였다. 공간적 운동은 역사적 운동과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철도와 진보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1989)고 정리한다. 이처럼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진보는 모더니티의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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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원더랜드_박서영: 바흐티노프 마스크

박서영 기획전 《바흐티노프 마스크》(11. 7~26 부연, 옹노) 전시 포스터(디자인: 정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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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골목길의 조각난 보도블록처럼 매일 발견되는 사물의 시체, 터진 내장 위 그려진 어김없는 발자국. 우리는 인류의 진면목을 본다. 이 인류는 사물을 두려워한다. 인류를 대신해 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하여, 또 대신 병을 앓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마침내 대신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하여…. 인류는 영원히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자연스럽게’ 부인하려 하지만, 사물의 논리에서 고지서는 어떻게서든 도착한다는 걸 그들은 ‘애써’ 알고 있다. 인류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사물이 인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대체’하고자 창궐해 왔다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무상無常과 내적 자유, 올림피아의 신이 누렸던 것과 같은 이상理想의 개념이 요구하는 것은, 이 순간 인류보다 사물에게 가장 충실하다. 인간이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류의 멸종을 막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으나, 그 답은 세계가 지르는 비명에 저 값의 유예만큼 가려질 것이다. 《바흐티노프 마스크》. 전시는 그렇게 그쪽으로 걷는 것 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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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환해지는 순간_류주영: Dear Summer,

류주영 개인전 《Dear Summer》(10. 27~11. 18 아트사이드갤러리)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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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달이 수풀에 던지는 열네 번 무감한 입맞춤. 그리고 문득 가장 구체적인 어둠이 온다. 술과 피 섞인 그늘에 잠겨있던 초록 사포는 서로를 찌르면서 자라났다. 죽은 핏줄의 흰 목을 마지막으로 만질 때처럼 서걱거리는 결과 질감은 시간에 비추어 봤을 때 수상한 기색이 없다. 모든 이들이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으므로 닫힌 대지처럼 굳게 입을 다물어야 할 때. 하지만 허기에도 낮이 처방해 준 수면제를 한 번도 먹지 않은 입술은 이내 피어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니 희망은 외로운 것이고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나는, 어둠을 절망의 권리로 허락하지 않는 작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했다. “가장 우울하고 암울한 시간 속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은 세상이 참으로 상냥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삶은 때로는 힘들고 슬프고 우울하다는 것’을 상냥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저 세상이 상냥하다고 했더라면 절망의 권리로 항변했을 텐데, 절망을 건네는 온유함 그래서 그것으로 희망을 길어 올리는 것이라면 도무지 저버릴 길이 없다. 희망에 관한 표현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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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레드 어워드 총평

2023 레드 어워드(11. 13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 포스터

세상에서 가장 붉은 시상식 레드 어워드. 우리는 세계를 상상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다시’ 바꿔 놓은 예술, 세계의 부정을 넘어 자본과 맞서고자 하는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과 함께 투쟁하는 예술을 매년 기다려 왔다. 그렇기에 레드 어워드 수상작의 면면은 당대의 불투명한 전선을 인식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수상작을 보면 우리가 무엇과 싸워왔는지, 무엇을 위해 어깨를 걸어야 하는지가 보였다. 작년엔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파업이 쏘아 올린 비정규직, 하청 노동이 최대 의제로 번졌고, 2021년엔 여성, 노동자, 이주민의 등 사회적 타자의 투쟁을 역사화하는 작업을 통해 기억, 진실과 다퉈야만 했던 포스트트루스 시대가 쟁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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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웹진 퐁』 대담_조재연×엄제현의 티티카카

⟨조재연×엄제현의 티티카카⟩ 연재를 알립니다. 『비평웹진 퐁』에서 진행된 본 기획은 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의 2023년 3월호 특집 「동시대미술의 뉴 웨이브: 영 큐레이터 35, 힙 토픽」에 집계된 주제와 키워드, 작품을 유람합니다. 전문은 아래 링크 혹은 『퐁』 웹사이트(www.pong.pub)에서.

❶ 테크놀로지
❷ 정체성, 인간
❸ 친환경, 매체
❹ 현실 참여
❺ 작은 이야기

얼굴 하나야_김인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김인혜 개인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5. 19~6. 1 갤러리TYA) 전시 포스터(디자인: 장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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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얼굴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흰 종이배처럼 발그스름한 물결 위를 떠돌며 나는 그것을 배웠다. 너의 낯설었던 낯은 눈부심으로 띄워졌다가 해석을 향해 흘러가고, 그 무게가 익숙함으로 젖어갈 때쯤 응시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니까. 둥근 이마와 굴곡진 코, 눈동자의 깊이는 진부해진 이후 더는 낱낱이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가면들이 뜨거운 모래 위에서 녹고 마침내 속살이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났을 때. 눈먼 나, 젖은 손가락으로 기쁨과 슬픔 그리고 노여움과 환희의 주름을 읽게 된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어떤 진부함도 남지 않는다. 외려 있다, 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의문뿐이다. 어째서 눈은 호수가 아니고 눈인지. 내민 뺨은 밀어내기보다 어떻게 수렁처럼 나를 끌어당기는지. 균형을 잃은 낙하산처럼, 때로는 표류하는 뱃머리처럼 능선과 그것을 어르는 노을 사이에서, 제자리에서 길을 잃는 나. 이제 모든 것이 생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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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성 모래 모래_차지량: dream pop

《dream pop》(2022. 12. 1~12. 31 d/p) 아티스트 토크 ‘꿈/깸’과 ‘중얼중얼’ 전경

밤이 가장 길었던 밤. 바다를 쏟는 사막에서 지느러미가 바삭이는 붕어,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를 두고 우린 별처럼 웅성거렸다. 부자가 되는 행운에 대해서 말했고, 유전을 찾느라 모래에 새긴 발자욱과 서풍에 잠긴 길을 돌이켰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진짜 아버지는 어둠 후에 잠 말고 어떤 시간이 있는지 몰랐으므로, 혹은 손톱과 머리칼 이외에 물려줄 게 없어 오늘 말한 그런 저택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거야. 부서지기 전에도 처분할 수 있는 가구, 헤어진 연인과 동시에 내쫓을 수 있는 집기로 채워진 사물의 집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허름한 가게가 문을 닫는 것만으로도 눈물짓고, 온 세상 대신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더라도 축하해주며, 둥글게 모여 앉아 투명한 모닥불을 소리로 이룩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가장 가난한 이는 🦋였다. 그는 허구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난했다. 모래성이 어떤 모래가 되고 다시 다른 모래로, 처음이 되는 과정을 가질 뿐인 그 이름. 아름답고 반짝이지만 그 안에서 살 수 없고, 한순간 무너지며 모래로 응결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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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_『Flou』 vol.1

신새벽, 임보람, 임지현, 조재연, 황지원, 『Flou』 1, (심동수 발행), 만다린프레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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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 놓았겠지. 너는 무인도에서 출발한 코르크 병처럼 눈을 감고 하루 종일 작은 밀썰물의 애무를 느낀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바다는 늘 자신을 향하여 흐르기에, 너는 출발하지 않고서 도달하고, 도착하지 않은 채 떠난다. 부서진 차, 손에 묻은 피, 젖은 신발 그리고 오발 혹은 불발을 예정한 권총 한 자루…. 이다지도 무겁고 끈적이는 운명을 두고 너는 지난 일과 결별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다. 너는 늘 한가운데서 비롯해야만 한다. 한가운데. 뜨고 지는 영원한 자맥질을 통해 네가 알게 된 것은 바다의 너비가 아니라 고락高落이다. 기어이 너를 살리겠다는 것인지, 이냥 묻어버리겠다는 것인지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갈 때, 결국 너는 생이란 어딘가 닿는 것이 아니라 체념과 기대를 반복하며 파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마음 중 어느 하나에 의지해 살 수는 없다. 멀어져서도 가라앉아도 안 되기에 너는 그저 두 마음의 오고 감을 도리 없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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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통행로_김효진: 에코의 초상

김효진, (홍예지 기획), ⟪에코의 초상⟫,김희수아트센터, 2022. 8. 1.~29, 전시 포스터(디자인: 조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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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지경초 엄상식정목(疾風之勁草 嚴霜識貞木)〉에 숨어 있는 화자는 들판에 서서 초목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있다. 직선으로 뻗은 동선에서 벗어나려는 듯 사방을 향해 흔들리는 그들은 스스로가 꼼짝 않고 응시하던 어떤 것에서 멀어지려 한다. 풀이 누웠다 일어나고 가지가 얼고 녹는 반복이, 제목이 지시하는 거센 바람(疾風)과 늦가을 서리(嚴霜)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통념을 벗어나는 관찰이라 볼 수 없다. 이때 시선은 초목을 제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날씨라는 상투적인 인식 아래서, 바람과 서리가 그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킬 뿐이다. 그러나 김효진은 상황을 달리 명명하고 있다. 그림은 풍경을 고정된 방향으로부터 내쫓는다. 곱지 않은 날씨가 처소에 도착하는 동안, 화자는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린다’와 ‘풀이 눕고 나무가 언다’를 선후관계로 파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관계가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는 것일 수도 있고, 나무는 서리보다 먼저 얼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작가는 이 풍경을 이름할 때 주객의 방향을 반대로 뒤집어 놓는다. 풀에 도달하는 바람 대신 바람을 좇는 풀, 나무를 결빙하는 서리가 아닌 김을 얼리는 가지. 예술은 통념을 해체하고 거기에 혼돈을 들어 앉힌다. 이 가을의 초목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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