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으로 고요를 짓는 일_비아니, 곽철안: Black Echo

비아니, 곽철안 《Black Echo》 전경 5. 14~6. 14 아줄레주갤러리

고요는 소란을 딛고 일어선다. 소란에게는 고요를 길러낼 힘이 있고, 결국엔 기척도 없이 고요가 등 뒤에 따르리라는 믿음은 견고하다. 그러나 이 말을 비가 오고 땅이 굳는다는 흔한 교훈으로 입에 담을 생각은 없다. 여윈 바늘이 떨고 있는 한 우린 나침반 가리키는 방향을 믿을 수 있다. 모두가 잠든 밤이 지닌 적막은 사실 별과 개울, 풀벌레의 낮고 작은 웅성거림으로 빚어진다. 그렇다면 고요는 소란과 나란히 놓인다. 소란의 끝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다. 소란이 고요의 형식일지 모른다는 것. 나는 비아니(Viani)와 곽철안의 《Black Echo》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작가의 세계는 고요하다. 완주를 마친 원과 제 길이를 모두 펼친 선. 그러나 여전히 분출하는 빛무리와 그치지 않는 선율. 누구보다 완연한 고요가 그럴 수는 없는 것. 오히려 조형 곳곳은 소란하여 고요를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은 아닐지. 이들의 파동을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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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이미지·이미지_유숙형, 임주언: 경계의 파편

유숙형, 임주언 《경계의 파편 : 이미지의 유영》 전경 4. 11~5. 10 보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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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림이 앞으로 튀어나오진 않는다. 회화의 깊이와 재현의 성취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예컨대 회화가 무엇인가 등장하는 장면을 그려낼 때 그것은 1차원의 이미지다. 그런데 모든 이미지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선택과 조율을 통해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화면은 한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재구성한 2차원의 이미지로 다시 규정될 수 있다. 뿐인가. 이미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해석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장면을 받아들일지 혹은 그 배면을 톺아야 할지를 감상자가 판단해야 하는 이미지, 다시 말해 해석을 요청하는 이미지는 3차원의 것이 된다. 나는 지금 유숙형, 임주언의 《경계의 파편: 이미지의 유영》이 지닌 세 개의 차원을 말하고 있다. 평면이라 할지라도 작품은 결과 겹을 지닌다.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 2차원의 회화로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산적해 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개별적 사건이 웹을 통해 즉각 공유되는 시대에 새로운 내러티브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획일적으로 살고 있기에 내면을 돌아본들 독자적으로 고백할 것 역시 딱히 없다. 3차원의 회화는 이때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 타인도 자신의 이미지도 아닌, 단지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회화. 전시의 표제를 빌리자면 이른바 유영游泳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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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먼지_신용진의 회화

신용진 개인전 《저편의 양》 2022, 10. 14~30 공간운솔

신용진은 먼지로 감각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보이지 않던 입자, 폐기된 감각, 잊힌 신체의 흔적을 따라 미술을 ‘재배치의 정치’로 전환해 왔다. 여기서 ‘먼지’는 은유이자 실재다. 은유의 관점에서 먼지는 체계에서 추방되고, 터와 이름을 잃어가는 존재를 대변한다. 논문이 되지 못한 텍스트, 작업실 구석에 쓸려나간 안료, 폐기물로 남겨진 장갑….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 먼지는 예술로 환기될 두 번째 생의 기회를 부여받는다. 한편 실재의 관점에서 먼지는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이루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의 형식이다. 모든 것이 먼지로 사그라지고, 그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세계에서, 먼지는 소멸을 가리키는 동시에 불멸을 지시한다. 존재는 먼지로 흩어지지만 먼지 그 이상으로 마멸되지 않고 끝내 다른 무엇이 된다. 따라서 그는 개인전 《공기색 입자》(2024, 12. 10~29 10의n승)를 구현하기 전부터 먼지를 쓰고 있었고, 먼지는 이번에 제 팔자만큼 우주가 되었다. 사그라든 것과 무엇으로든 출발해야 하는 것 사이에 먼지의 진동은 있다. 그리고 의미 없는 것과 그럼에도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 간에 삶이 흔들린다. 둘은 다르지 않다. 폐허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의미에 패배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나. 기어이 무의미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 먼지가 되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을 때까지 바닥을 전락한 후에야 비로소 의미는 다시 움트기 시작한다. 의미란 싸움 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무의미에서 발버둥 치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얻는다. 따라서 신용진의 예술은 꺼진 것처럼 보이는 사투에 불을 붙여 다시 생을 불어넣는 일이다. 어차피 사라질 일, 그러나 먼지는 그친 적 없는 일. 방랑과 유랑을 쉴 수 없고, 생을 찌꺼기까지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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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문 크리스털 파워_김지우: 히로인의 계보학

〈소녀의 계보학 2〉 순지에 채색 60×30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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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는 한때 우리 것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금지된 환상을 다시 한번 ‘지금 여기’에 불러낸다. 잊히거나 놓쳐버린, 잠들었던 것들이 실재의 틈을 비집고 돌아온다. 투명한 현실은 이 순간 가장 흐릿하다. 꿈이, 마법이, 운명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미술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단절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삶 어딘가에서 늘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는 채로 잃어버린다. 미술이 하는 일은 일상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미술의 형안으로만 겨우 보이는 그 분실을, 도로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었거나, 있거나, 있게 될 미지未知의 발견. 그러나 그들은 이제 내게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미생未生의 발견. 두 발견으로 삶은 불편해진다. 유용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그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일부)를 상실했다는 예감이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미술에서 ‘사건’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김지우의 회화는 더 지독해서, 그 잃어버린 것들이 여전히 화면이 아닌 우리에게 존재한다고 속삭인다. 돌이킬 수 없다면 기꺼이 체념할 텐데 그가 남겨놓은 희망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사라진 것을 되돌리는 것은 미술이 아니다. 그것을 다시 볼 수 있는 눈. 작가는 그 시선의 가능성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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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렁더우렁, 직조의 자연_문현수: 카네이션 미학

〈별빛이 흐르는 숲 1〉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및 염색 91×65cm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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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수는 자연을 직조한다. 그리고 이 말에는 무수한 결과 겹이 있다. 미술은 하나로 보이는 것이 서로 다른 존재의 엮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고, 그것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다시 감추어야 한다. 이것이 미술에서 ‘조형’이 하는 일이다. ‘조형’이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는 느슨한 이해일 뿐이다. 조형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구성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이다. 탁월한 조형에는 형태가 하나의 통일된 구조로 인식되면서도, 그 안에는 개별 요소가 여전히 독립적으로 ‘살아’있다. 모든 대상이 하나의 화면으로 환원되면서도 존재의 이질성이 마멸되지 않는 이중의 동일성Identity of opposites. 문현수 회화가 지닌 힘은 여기에 있다. 작가의 직조는 모든 것을 자연의 ‘결’ 아래 엮어내지만 동시에 인간과 사물, 도시의 제 모습을 ‘겹’으로 포개낸다. 그러니 조형은 그저 미술과 동의어가 아니다. 조형은 존재의 관계를 새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고, 존재의 본질을 보전한다는 점에서 세계와 화해하는 일이다. 문현수의 조형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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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대오_오민수의 설치

오민수 〈아웃소싱 미라클〉 스피커, 모터 외 혼합매체 가변크기 2020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
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
― 심보선, 「예술가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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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가장 구태스러운 질문이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만들어낸다. 오민수의 예술이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느꼈다. 우리에게 그의 설치는 넓은 의미의 ‘참여’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옹호처럼 보인다. 화염병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은 화염병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면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이 자명한 명제는 예술이 더는 현장을 찾지 않은 채로도 다툼을 만들어내는 완숙한 닻이 되어주었다. 구체적인 현안은 이제 예술의 대상이 아니니, 예술은 그저 실재에서 물러나 그것을 주조하는 형이상학과 싸워야 할 몫을 갖는다는 것. 건설 노동자의 분신 대신에 인간 소외를 은유하는 알레고리, 구축 당하는 빈민 대신에 폐허의 미학을 건설하는 멜랑콜리적 구성, 정부의 언론 장악 대신 어떤 표현도 가능한 초현실적 세계관의 구축…, 이들은 현안에서 물러나지만 갈음을 통해 총체성에 닿는다. 장기적으로 혁명은 이 총체성 위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린 미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비판이 감미롭게 들리고 가장 안전한 단어로 변모할 때, 창작은 정치를 심미화하는 데 그친다. 혁명을 노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최종심에 다다를 때까지 예술은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민수의 예술은 여기에 대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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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_호상근의 회화

〈화단에 식빵 두장〉 종이 위에 연필, 색연필 420×297mm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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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근은 일상의 관성을 그린다. 일상 혹은 삶의 의미에 대한 골치 아픈 질문을 작가는 존재에 대한 찬가로 돌파한다. 그의 회화는 늘 거리 어딘가에 있다. 여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둘기가 도로를 거닌다, 카트가 쓰러진다, 눈이 날린다, 타올이 마른다, 당근이 썩어간다…, 그렇게 일상은 반복된다. 작품은 반복의 발견이고, 그 발견은 또 다른 발견을 더해 나가면서 ‘이러한 존재 형식은 어떤가’라는 제안이 된다. 우리는 일상의 어느 한구석을 노려볼 때 특별함과 만나고, 오늘을 어딘가의 비극과 비교한다면 하루의 소중함을 더욱 깨달을 수 있다. 신앙으로 비롯된다면 아름다움은 끝이 없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예술이 아닐지도 모른다. 호상근의 회화가 당연했던 적은 없다. ‘일상에는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작가가 준비한 대답은 이것뿐이다.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존재로 바꾸면, 존재가 긍정되는 데에는 의미는 필요치 않다. 존재하니까, 계속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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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이여, 다시 한 번_황예지의 사진

황예지 〈마리아〉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40×60 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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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서정’이 있다. 서정은 이제 충분하다는 얘기다. ‘일상’이라는 터전, ‘내면’이라는 수단, ‘자연’이라는 이상을 꼭짓점 삼은 삼각형에 안착한 서정은, 더 이상 스타일이기보다 메커니즘으로서 소진된다. 주변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보고 보듬는, 그로써 진부한 하루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감동을 낚아 올려 깨달음에 도달하는 서정의 논리는 미술 안에서 형식으로서 반복되거나, 혹은 미술 그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다음에도 삶은 도무지 특별해지지 않는다. 서정 위에서 깨달음이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는 쉬워도 위협적이지 않은 까닭이다. 삶의 진실은 그러니까 진리는 늘 위협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아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삶을 새로이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놔두고, 미처 자아가 눈치채지 못한 것을 발견하면 될 뿐이라며 진실로부터 물러서는 것. 그러니까 세계엔 잘못이 없고 그저 자아의 깨달음이 문제였다는 헌신적이다 못해 숭고한 반성의 점철. 이때 서정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향유하는 것으로써 부조리와 동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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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미술, 사물 스스로 그린_게리 코마린: Landscape wit a Cup

게리 코마린, 〈Cake, Stacked, Green on Blue〉 캔버스에 에나멜 패인트, 수채 129×120.5cm 2022

내 그림은 사전 구상 없이 진행된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린다. 가장 훌륭한 그림은 가장 많이 실패한 그림이다. 그림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화가인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때, 바로 좋은 상태이다. 나의 목표는 그림이 스스로 그려지는 것이다. ― 개리 코마린

개리 코마린(Gary Komarin)은 사물의 잊혀진 얼굴을 그린다. 그가 풍경에서 대상 사이의 고리를 풀어내고 느슨한 자욱만을 비출 때, 그리고 오브제의 섬세한 겹 대신 앙상한 윤곽으로서 그 낯만을 드러낼 때, 우리는 사물이 어떤 얼굴을 띄었는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대다수의 화가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리면 되는지…. 그러나 그런 그림은 아름다움만을 간신히 거느릴 뿐 진실을 담지 못한다. 코마린 회화의 매혹은 그가 대상을 모른다고 말하는 데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을 포착했고 느꼈으며 그렸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고백. 누군가 예술이 진실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을 때, 코마린은 예술이 진실을 표현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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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정거장_2023 대구권 미술대 연합전 PLATFORM

2023 대구권 미술대학 연합전 《PLATFORM》(기획: 박천) 전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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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의 작가와 그들을 엮은 18개 주제전. 대규모 전시를 정거장(platform)에 빗대는 것은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키워드로는 도무지 꿰뚫을 수 없는 저마다의 풍경이 있고, 각자의 목적지를 지닌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장소에서 플랫폼보다 더 나은 비유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 이들을 싣고 나르는 ‘기차’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곳이 그저 꾸러미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1850년에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는 명제를 제시했고, 3년 뒤 미셸 슈발리에는 철도 건설을 “몇 세기 전의 교회 건축에 비견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잔 벅모스는 이 시기를 “철도는 지시물이었고 진보는 기호였다. 공간적 운동은 역사적 운동과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철도와 진보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1989)고 정리한다. 이처럼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진보는 모더니티의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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