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의 주방》 2017.12.07.-2018.01.14.

마담의 주방
2017.12.07-01.14
대안공간 눈 제1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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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레지던시에서 그때 마담은 뭐든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맞았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녀는 작업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가 작업에 대해서 말할 때면, 그녀는 꼭 나의 평소를 언급했다. 다음 전시에 일본인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이름이 일본어의 어떤 발음과 겹치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거나,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현지인들이 보기에 무섭게 느껴질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꼭 작업에 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늘 예술가인 사람이거나, 늘 동류인 예술가인 듯 했다. 그 맥락 위에서 나의 평소는 혹은 거창하게 삶은 작업의 과정 안에 대등하게 있거나 완성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늘 진행 중인 전개의 형식을 유지했다. 어쩐지. 그때 마담은 뭐든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맞았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 작업의 출처가 내 일상이라는 것, 내 작업은 그때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된다는 것을 그녀는 주방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2
예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것의 함유성에 대한 타자로서 외부에 존재한다. 환락(歡樂)의 대상인 예술을 일상과 일치시킬 때 그것은 도구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방의 창구로서 기능한다. 모더니즘 미학이 예술에 희망을 걸며 가망 없는 헌신을 하려는 바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앞의 이 두 문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하나이자 곧 전체일 ‘상품’은 우리에게 오직 결과로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방식을 통해서 생산 되었는지 중요하지 않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가격만을 가진 채 결과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예술엔 늘 ‘과정’의 물음이 끈적이게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것이 담보하는 비평의 가능성은 곧 ‘비판’의 가능성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긴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상품에 대한 리뷰는 창궐하지만 예술에 대한 비평이 빈곤함은 그 자체로 비평의 위기를 넘어서 예술의 위기이자 변혁의 위기일 것이다. 이 위기를 유예시키기 위해서 예술은 비평을 담보했던 ‘과정’을 보존해야한다. 약정된 작업실에서 일상으로, 완결된 작품이 아닌 태동하고 전개하는 작업으로. 그건 예술의 몫이다.

《취향은 존재의 집》 2017.12.07.-2018.01.14.

취향은 존재의 집
2017.12. 07. ~ 2018. 01. 14
대안공간 눈

“이해”란 해석학적으로 공통-보편이라고 할 만한-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 반대로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이기만한 일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취향존중, 줄여서 “취존”이란 낱말의 쓰임새는 그 개인적이기만한 일을 이해해달라는 요청임에도, 그자체로 그것은 모순을 갖게되는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 즉 취향과 공통의 지평이라 칭해지는 이해는 서로를 늘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존”은 그것이 내뱉어질 때마다 상대의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쉽게도 방치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취향이라면 더 이상 상대를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취향은 그래서 존재가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며,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때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이라면, 그리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가장 개인적이기만한 일들에서도 공통의 지평을 찾는 일에 종사해야만 한다. 기획된 전시들이 모두 경유하는 지점은 그렇게 취향에서 공통의 지평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것을 공통의 지평에 위치시키는 것은 가장 고유한 예술의 몫이다. “저 그림은 아름답다.”라고 일컬어질 때, 그것은 내게만 아름답다는 말로 풀이되지 않는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판단’임에도 표현을한 예술가의 취향도, 받아들이는 ‘나’의 취향도 그것이 모두에게 아름답길 염원한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가장 오랜 믿음을 가지고 헌신했던 것은 예술일지도 모른다.

취향은 가장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장소는 늘 사회에 놓여져있고, 그것의 문을 연다면 그 사회 그러니까 공통의 지평과 마주할 수 있다.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 있다.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나’일 때가 있다. 전시는 그 문을 열고 이음을 만들고자 한다.

그 순간에도.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혁명가로서의 예술가》 2017.11. 07.-11. 17.

혁명가로서의 예술가
2017.11. 07. ~ 11. 17.
경의선공유지미술관 M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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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쁘다,
지금만큼 많은 시, 소설, 전시 그리고 공연이 어디서나 흘러 넘치던 시절이 있었을까. 그리고 상품마저 예술이기를 소망해 시장이 갤러리가 될 때,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움이 창궐하는 시대가 된다. 이미 충분한 ‘시’가 쓰여지고 충분한 노래가 불러진 그 후에도, ‘다음’의 시가 쓰이고 ‘다음’의 노래가 불린다. 여전히 ‘다음’이 있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넘쳐나듯이 화폐가 유례없이 흐르는 까닭이거나, 아름다움이 창궐하는 세계가 곧 아름다운 세계는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고, ‘세계’라는 낱말은 지금의 예술이 기억할 단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적인 생산을 하는 것’이 ‘세계의 미(美)에 헌신하는 것’과 언제나 다르지 않았던 세기를 소환함은, 끝났다고 생각한 결산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세계를 상대로 좀처럼 거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여전히 ‘세계’는 예술을 상대로 대립하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예술은 다시 전선(戰線)에 선채로 결산을 시도한다.

2
존재하는 것들의 ‘세계’를 응시하는 것보다, 존재자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은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세계’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과 세계 이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시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으니, 전체 같은 이야기는 하지말고 애틋한 ‘부분’들을 돌아보자는 것. 지난 세기, 세계 전체를 응시하는 정치의 모든 이름이 ‘혁명’었다면 아마도 혁명이란 단어는 그 끄트머리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폐기는 곧 세계 자체를 문제시 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공허한 정치만을 남긴다. 세계는 매일 매일 변화한다. 바뀌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세계 그 자체다. 이제는 돌아와 전선 앞에 선 예술은 ‘세계’와 ’혁명’을 발음할 줄 모르는 정치 대신에 다시 혁명을 지껄여야 한다. 예술가는 투쟁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투쟁은 응당 작업실을 초과하는 활동이 된다. 시위, 노조, 정당, 직업 정치인 그리고 혁명가. 예술의 고유한 몫은 가능한 차선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을 지향하는 데 있으므로, 넘쳐나는 아름다움에 침전하는 것 대신 세계와 투쟁하기로 한 예술가는 예술의 최대치로서 작업을 초과해 직접 정치에 그리고 마침내 혁명에 참여해야만 한다.

소환된 작가들은 모두 그 최대치에 도달했던 이들이다. 그들의 투쟁은 예술의 외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예술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 그 몫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계와의 투쟁은 작가의 작업과 반드시 동연이었다.

경의선공유지 미술관 모라MoRA

동지들과 경의선공유지에 미술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이름은 “모라”(MoRA, The Museum of R Art)입니다. “모라”는 실험적인 기획과 경의선공유지의 의미 안에서, 시민들이 전유할 수 있는 대안 공간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예술이 혁명을 발음할 수 있다면, “모라”는 그것의 진채 혹은 ‘진지’가 됩니다. 위치는 공덕역 1번 출구에서 경의선 숲길을 향하면 먼저 도착하게 되는 경의선공유지 늘장을 만나게 됩니다. 늘장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에서 모라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문) 모라 페이스북 페이지

경의선공유지미술관 모라는 공유 정신의 토대 위에서 시민과 예술가가 함께 새로운 예술을 실험하는 대안예술공간입니다. 모라는 예술을 통해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입니다. 모라는 경력과 학력, 무엇보다 능력과 관계없이 예술가임을 선언하는 모든 시민과 함께합니다. 모라는 노동하는 예술가, 투쟁하는 예술가와 함께합니다.

TAKE A MEMO 02

“조금 아는것은 위험한 것이다. 깊이 마시지 않을 거라면 피에리아의 샘물을 맛보지 말라.” 알렉산더 포프는 그의 장시(長詩) ‘비평에 대한 에세이’(An Essay on Criticism, 1709)에서 그렇게 말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모름마저도 알기에 더 알려고 노력하겠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그가 다 안다고 생각해서 더 알려고 하지도 검증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포프는 그것을 취한 뇌라 불렀다. 그래서 말은 더 커지고, 행동은 거칠게 실현된다. 그러다 이윽고 타인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조금 알았기에, 다 아는 사람인 척했던 나는 지금까지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중에서도 여전히 기억에 끈질기게 머무는 부끄럼과 죄는 「민영아 어디서 잤어」라는 글을 쓴 것이었다. 나는 상처를 낸지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른지도 모르고 글을 쓰고선 정말 오랫동안 자랑스러워 했다.

글에는 ‘민영’이 등장한다. 민영아는 글에서 대상으로 삼았던 ‘민영화’의 의인화였다. ‘민영’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던 산이의 「어디서 잤어」와 접촉되 하나의 패러디식의 글을 구성한다. 그리고 「어디서 잤어」의 미소지니를 계승하는 것과 별개로 미소지니를 재창조하고 반복한다. 이 위에서 여성은 권력적 제물과 폭력의 대상을 지나 윤리적으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대상이 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미소지니 안의 여성을 경유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는 비판이라면 그것은 옳은 비판도 타당한 비판도 되지 못한다. 타당한 정치 비판이 있어야할 자리에 풍자와 해학이란 위선적인 허물을 뒤집어쓰고, 그곳에 여성을 소환하여 비판의 부재에 대한 알리바이를 해명한다. 권력을 여성으로 만든 뒤에야 가능했던 오물같은 비판은 결국 글쓴이의 무능력으로 미소지니를 재생산하고 그로써 위축된 성을, 상처받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구조에 기여했다.

그러곤 한참동안 기뻐했다. 심지어 참담하고 악랄한 것은 이 블로그에 「TAKE A MEMO 01」란 글처럼 그것을 내 글쓰기와 사회에 대한 태도에 준거점이자 능력의 증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폭력은 정의와 같은 대의나 선의와 결합되었다고 믿어질 때 제일가는 악을 낳는다. 특히 그것이 구조적 폭력일 때 그 악취가 은밀히 오래가는 법이다. 조금 아는 사람이 쉽게 쓴 그 글은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없이 위선적이며, 비겁하고, 무능하면서, 악랄하다. 그것을 뱉는 나다. 이글 내내 맘에 드는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숨기려고하거나 주저하고 있는 그것을 뱉는 나다. 아마도 그날의 나와도, 흐르는 나와도 악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망록은 지금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나중에라도 풀기 위해서 남기는 글이고, 참회록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앞에서 나는 많이 아는 사람은 스스로의 모름마저도 알기에 더 알려고 노력한다고 썼다. 지금 나는 조금 아는 사람이지만 그 위태로움을 알기에 많이 알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를 참회라고 하기엔 깨달음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싶다. 이글을 참회록이 되기위한 비망록으로 남긴다.

《한입만-行: 구걸하는 예술》 2017.3.18.-3.26.

한입만-行_구걸하는 예술
2017.3.18.-3.26.
서교예술실험센터 1호실

1
한 입만, 이라고.
언젠가 어렸을 때 한 번쯤 해봤을 것 같은 이 말은 이제 와서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어쩐지 우린, 이 말을 꽤나 당당하게 했던 것 같다. 이 말의 공간은 타인을 향한 마냥의 굴욕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당신이 어쩌면 다 먹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을 대신 해결해주겠다는 근심 있는 배려와, 한 입 정도뿐 지나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자존심과 뻔뻔함이 있었다. 그 한 입을 통해 만족감을 얻은 내 얼굴로, 당신은 선량한 뿌듯함에 충만했고, 나는 당신의 표정에 찌꺼기 같은 굴욕마저도 잊을 수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모종의 한 입 이상의 가치가 생성되는 듯했다. 혈액형이 무엇이냐 묻고 다른 것을 확인하고도 한 입을 내어줄 때 우리는 차이를 횡단하고 생명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한 입만’은 그렇게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지속해오면서도 또 한 개체가 가장 최초로 실행하는 정치적・경제적 그리고 계급적인 연대였다.

2
삶이 빈곤해지자 예술은 다시 빈곤해진다. ‘산다’는 말이 ‘살아간다’가 되고 그것이 다시 ‘살아낸다’로 바뀔 때쯤, 그러니까 그렇게 조여지는 순간마다 늘 손쉽게 줄이거나 소거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이었다. 시디를 사지 않게 되고, 가던 극장, 공연장을 줄이고 전시를 보러 가지 않게 될 때, 이윽고 예술은 공간과 거리를 잃는다. 이때 예술은 비로소 ‘생존’엔 도통 쓸모없는 것이란 것을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술은 어쨌거나 잉여 같은 남은 것들의 함유물이거나 충적지라는 것. 그리고 처연해진 예술이 돌아와 공간과 거리를 찾으려고 할 때, 엄격한 세계는 예술에게 윽박질렀다. 네 쓸모를 증명하라. 쓸모없음의 함유물이자 충적지였던 것을 쓸모로 되돌리라니. 한 편의 예술들은 그동안 그래서 분주했었나 보다. 그러나 예술이 증명해야 할 것은 그것의 쓸모가 아니라 쓸모없음의 가치가 아닐까. 생존만을 얘기하고, 쓸모만을 알고 있는 세계에서 쓸모없는 것이 갖고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 그때 쓸모에 대하여 가난한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존재할 이유 하나쯤 인정해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예술은 거리에 나가 ‘한 입만’을 行했다. 타액을 거친 가장 쓸모없어진 것들을 가치로 이행시키고 싶었다.

그러니 꼭 이 전시가 쓸모없기를 바란다. 여전히 쓸모에 가난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가치 있기를.

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김승희 시인은 희망이 외롭다고 쓴다. 희망은 좀처럼 드물게만 놓여있어서 외롭고, 또 그것 때문에 맘 편히 망가져버리지도 못해 외롭다는 것. 그래서 비로소 광장이 된 거리가 제공해주는 것은 징후나, 미래따위의 낱말이 아니라 차라리 절망같은 희망이다. 광화문 끝까지 희망은 드물고, 드물게라도 있어 누구도 맘껏 기대하지도, 맘껏 절망하지도 못하는 어딘가 얹힌 것 같은 낯으로 우리는 서있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낱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살리려는 것은 그것이 앞으로의 좋은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꺼이 낯들은 희망을 마련하고자 ‘지날’ 시간에 헌신한다. 그렇게 시인의 끝맺음대로 기꺼이 “희망은 종신형이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발제

지금 예술이 때때로 쓸모 없거나 침묵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기.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때로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그러니/그래도/그러므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한 줌의 지식을 가지고 발제를 맡게되었습니다. 오는 30일, 경의선 광장에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입니다.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그래봤자 자본론 – 그래도 자본론 그리고 김수행

몇 개나 되는 혁명이 실패하고 얼마간의 변덕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자본이나 자본의 밖에 대한 말들은 언제나 드물게만 물음됐던 것 같다. 그 얼마동안 우리는 그것의 모순들을 마주할 때마다 젠체하듯 또 참신하고 세련되고자 애쓰듯 근대성이니 신자유주의니 하며 그의 이름을 애둘러 피해갔다. 하지만 그간의 우회가 일부의 정밀한 풍경을 묘사했을진 모를 일이지만 그것이 단 한번도 전체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한사코 자본론과 자본주의란 이름으로 돌아온 그간의 기억들을 우리는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이런 애두름과 귀환의 몇번의 번복에서도 선생은 언제나 더할나위 없이 언제나 탕아를 맞이하듯 또 홀로 싸우며 열성적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못나도록 자주 그 이름을 잊지만,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렇지만 필연적으로 그는 오래 기억될 것이고 오래 기억하고싶은 선생이었다. 그래봤자 자본론 – 그래도 자본론 그리고 김수행이 있었다.

TAKE A MEMO 01

11년 10월 16일, 월가 점령 시위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68혁명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 그는 그곳에서 대중들과 작게는 변하지 말 것을 크게는 더러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지기를 약속했다.

저 약속을 때때로 상기할 때면 작년 이맘때 즈음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철도 민영화 이야기로 열을 내고 있었다. 단순한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투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안부를 물으며 스스로를 반성에 열을 냈던 시기였다. 그동안의 구태한 운동 방식을 정면에서 고치려고 했었고, 침묵과 외면이 부끄러워 남몰래 새벽에 대자보를 붙이고 사라졌던 우리에게 그전으로는 절대로 방향을 돌릴 수도 복구시킬 수도 없던 ‘사건’같은 시기였다.

나도 대자보 한편을 썼더랬다. 운이 좋아 화제가 되었었고, 미디어에서도 여러 번 보도가 됐었다. 너는 왜 안 나가냐라고 액션을 강조하던 친구에게도 이게 나의 운동이야라고 오래간만에 반박할 기회가 되기도 했던 때였다. 그건 정말 나의 운동이었다. 마르크스가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운동. 그때 나는 글이 그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달필이나 셀럽이나 이론가로부터 깨닫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검증했으니까.

이 회상이 끝나면 약속은 기억 속에서 불쑥 나와 묻는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졌는가. 변했는가. 그러나 이 물음은 애초에 쉽게 답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순수함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의 따위는 전리품이 아님을. 그저 그 물음 속에서만, 묻는 동안에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그러므로 저 물음을 계속 갖고 있는 동안에만 겨우 그들을 갖는 것임을.

그래서 내가 반성해야 할 것은 가끔 자주 못나도록 물음을 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