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눈앞에 있음(Zuhandensein)’으로써 현전하는 존재와, ‘손안에 있음(Vorhandensein)’으로써 도구화된 존재를 구별했다. 사물이 도구적 용도로 파악되는 한 존재는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대리석을 재료 삼은 조각은 대리석 계단이 감춰놓은 것을 드러낸다. 일상에서 대리석 계단은 통속적인 부유함의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나 대리석 조각은 작품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던 물질의 현전을 보여준다.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하이데거는 그렇게 고흐의 구두가 신체의 보호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제 입으로 대지를 발음한다고 적었다. 이 순간 사물은 더 이상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한 출발점으로 남지 않는다. 외려 작품이 사물을 이해하는 장소가 된다. 이 전환은 단순히 예술적 사건을 넘어 우리를 일상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러나 작품이 된다고 해서 언제나 사물이 자유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서술에서 생략된 점이 있다면, 사물이 용도라는 ‘식민’ 상태에서 벗어날 때 동반된 지난한 투쟁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영배의 작품은 그 투쟁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사진은 작가의 개인전 <프로-포즈>(11. 6~27 사가)에 출품된 <하나의 의자 두 개의 다리 세 개의 동그라미>다. 낡은 표면엔 스스로의 용도를 폐기하기 위해서 분주했던 학대에 가까운 투쟁이 포괄돼 있다. 그가 이제껏 편의를 순순히 제공한 것은, 그로써 자신을 가학해 창조자가 부여한 소명(기능)과 갈라서기 위해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역모에 권위를 잃는 첫 번째 인간이다. 단 한 번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피사체를 놓치는 사진사는, 자신의 무능으로 사물의 독립에 기여한다. 쓸모의 박해를 피해 구르고 질주하며 의자는 비로소 용도로 가득 차 눈먼 세계에 혀를 굴려 침을 뱉는다. 영배가 카메라를 들고 장소를 찾는 동안 의자엔 누구도 앉지 않았고, 치워지지도 않았다. 저 현전하는 존재를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는 이제 세계를 발음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말을 잃었다.
참조
진은영, 「선행 없는 문학」,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pp.5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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