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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수는 자연을 직조한다. 그리고 이 말에는 무수한 결과 겹이 있다. 미술은 하나로 보이는 것이 서로 다른 존재의 엮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고, 그것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다시 감추어야 한다. 이것이 미술에서 ‘조형’이 하는 일이다. ‘조형’이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는 느슨한 이해일 뿐이다. 조형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구성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이다. 탁월한 조형에는 형태가 하나의 통일된 구조로 인식되면서도, 그 안에는 개별 요소가 여전히 독립적으로 ‘살아’있다. 모든 대상이 하나의 화면으로 환원되면서도 존재의 이질성이 마멸되지 않는 이중의 동일성Identity of opposites. 문현수 회화가 지닌 힘은 여기에 있다. 작가의 직조는 모든 것을 자연의 ‘결’ 아래 엮어내지만 동시에 인간과 사물, 도시의 제 모습을 ‘겹’으로 포개낸다. 그러니 조형은 그저 미술과 동의어가 아니다. 조형은 존재의 관계를 새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고, 존재의 본질을 보전한다는 점에서 세계와 화해하는 일이다. 문현수의 조형들이 그렇다.
문현수의 회화는 낙관적인 창조와 은밀한 화해로 분분하다. 다른 언어, 다른 주체, 다른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조형을 ‘직조’라 부를 수 있다. 작가가 ‘직조’의 방식을 물리적으로 내세우는 까닭만은 아니다. 직조는 늘 두 대상을 전제로 삼는다. 그가 자연을 직조할 때 이 안에서 매듭지어지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다.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엮이어 ‘자연’이 된다. 서툰 설명의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인다면, 직조의 결과로서 자연은 ‘세계’의 다른 이름, 즉 총체성으로 빚어진 자연이다. 한편 직조의 대상으로서 자연은 손에 닿는 풍경으로의 자연을 뜻한다. 우리는 뒤뜰에 핀 꽃을 보고 그가 계절과 대지 나아가 먼 우주를 유랑해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는다. 작가의 직조는 편협한 눈앞의 자연을 거대한 흐름으로 결속하는 일이고, 자연을 소유해 왔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다시 동여매는 일이다. 우리는 늘 자연을 ‘자연’으로 볼 수 있길 바랐고,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되뇌어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일상의 소박하고 사소한 낯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나의 결과 여럿의 겹’을 지닌 미술을 갈망했다. 그런 관점에서 문현수 회화는 길고 깊다. 그에게서 자연의 결과 겹을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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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아직 작가가 아닐 때 그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개념을 익힌다. 작가가 이제 작가일 때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개념을 버리는 일이다. 그때 작가는 개념 없이 재구성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개념으로 묶여있는 것을 해방해야 한다. 해방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일에서 출발하며, 새롭게 부여한 형태의 근거를 갖추는 자리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숲을 그리면서도 “가족과 사람의 다양한 삶을 표현하고” 싶었다 말했고, “지구와 우주”를 그린다고도 건넸다. 그의 미美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아름다움” 또한 포함된다. 고정된 찰나가 아닌 “환경과 자연이 계절 속에서 ‘변하’는” 과정 그리고 “다양한 나무가 자기만의 ‘특색’을 드러내며 ‘자기만의 멋’을 풍기”는 모습은 인류의 시야 밖 일이다. 개인전 《카네이션 미학》(백필균 기획, 2. 7~27 당진문예의전당)에는 문현수의 초기작부터 최근까지의 화력을 작품 122점으로 총망라한다. 이 화가가 해방이라는 책무에 얼마나 충실한지, 개념을 버리고 순수한 시선으로 사유하는 일에 얼마나 능란한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문현수의 초기작에서 오늘날까지의 변화를 다시 살피는 것으로 가능하다.
1980~90년대 초기작에서 자연은 눈앞의 자연, 즉 풍경에 그친다. 재해석이 가미되었지만 ‘기호화’에 가까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 개념에 접근하는 형상과 구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상이 아닌 배경에 힘을 싣는다면 우리는 화가가 일찌감치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꽃, 나무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곡선과 번짐의 표현은 찰나에 관찰된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자연은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몸짓으로 스스로를 생성한다―수사가 아니다. 자연은 실제로 그렇지 아니한가―. 외부에서 내부로, 다시 내부에서 외부로 흐르는 이 이중의 숨결은 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은 문현수만의 언어다. 이는 자연을 ‘그리는’ 방식에서 자연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예고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가의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던 모습에서 비로소 멀어지기 시작했다. 개념적 구성에서 점차 벗어나 자연이 갖는 리듬과 패턴을 화면에 반영했다. 배경은 일출의 형상을 품으며 자연의 이중적 흐름을 한층 극대화한다. 한편 새롭게 등장한 표현은 대상과 배경의 경계를 흐리려는 시도다. 자연을 이루는 개별 형상은 서로에게 침윤하고 스며들며, 문현수는 그 흐릿한 경계 너머에서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 망의 진동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2020년대에 들어 문현수 회화는 한층 더 자유로운 조형을 띤다. 자연은 더 이상 개념에 조금도 의지하지 않는다. 꽃과 나무는 잔영 속으로 사라지고, 자연의 흐름 자체가 곧 조형의 대상이 된다. 자연의 외형을 본뜨는 대신, 자연이 끊임없이 자신을 변주해 나가는 생성, 서로를 허물고 만드는 순환에 주목했다. 파라핀 염색과 홀치기 염색으로 물들인 천을 콜라주해 직조의 개념을 물리적 실천으로 확장한 것도 이 시기다. 원단에 물감이 번지는 과정은 섬유의 두께와 표면, 주변의 습도와 온도 등 외부 조건에 따라 형상이 결정되는 우연의 형식을 띤다. 자연의 원초적 흐름, 자연 스스로 만들어내는 질서가 그대로 화면에 들어온다. 이제 자연은 작가와 함께 작품을 창작하는 공동의 주체다. 최근 문현수의 화면에는 기하학적 추상이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여기에 각 도형은 자연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모나드’처럼 놓인다. 도형이 서로의 모서리를 맞댈 때마다, 우리는 그 틈새에서 숲의 그림자와 산의 윤곽을 더듬는다. 자연의 생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작가는 이 가능성의 층을 가장 단순한 단위로 환원함으로써, 그 본질에 밀착하려 한다. 도형은 자연의 피부가 아니라 자연의 ‘알맹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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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는 199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늘 바늘에 매료되곤 했다. 상처를 꿰매는 그 능력 때문에, 바늘은 어쩌면 용서를 상징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현수 회화는 이렇게 답한다. 직조는 존재와 존재가 함께하는 지평을 열어낸다는 점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매듭’이고, 굳어진 이름과 닫힌 의미를 풀어 존재를 자유로운 본질로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세계와 화해하는 ‘봉합’이라고. 문현수가 창조한 세계이자 화해의 이름은 ‘자연’이었다. 자연은 문현수가 지닌 하나의 결이다. 그리고 결은 다시 세 개의 겹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겹은 ‘자연과 자연’이다. 자연과 자연의 직조는, 구체적인 낯을 지닌 자연이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자연, 즉 전체로서의 자연으로 펼쳐지는 과정이다. 작가에게 꽃은 그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꽃의 떨림은 물결로 번지고, 물결은 빛을 반사하며, 빛은 또다시 숲 전체를 물들인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나부낌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그것이 지구 밖에서 출발한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과정이 때로는 형상에서 발현한 곡선으로, 때로는 분위기에서 유출된 번짐으로 드러난다.

두 번째 겹은 ‘자연과 인간’이다. 문현수 회화에서 인간은 자연을 통해 제 위치를 재발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연이 되어간다. 작가의 염색 기법은 염료가 자기 모습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은유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 왔다는 믿음은 신화일 뿐이다. 인간은 주체적이다. 그러나 늘 자연과 더불어 주체적이다. 비행이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탈’ 때 가능하듯, 주체성은 능력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이는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보던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상호적 관계라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문현수의 기하학적 요소는 이 지점에서 흥미롭다. 여기서 도형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상반된 테마를 동시에 암시한다. 자연 내부에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형이 기하학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사유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외려 자연을 연상시키는 통로가 될 때 기하학은 자연의 언어와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가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었던 이유다.
마지막 겹은 ‘인간과 인간’이다. 인간 사이의 매듭은 방법론과 작가적 태도에서 드러난다. 문현수의 주 장르는 회화지만 방법론의 관점에선 공예적 면모가 묻어난다. 파라핀, 홀치기 염색 기법과 패치워크, 아상블라주의 흔적이 느껴지는 천 콜라주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소량의 도자가 해당한다. 공예는 전통적으로 타인과 협업이 전제된 공동체의 산물이다. 기술은 전수되고 장인의 경험, 시간, 노동이 집적돼 완성된다. 공예의 차용은 문현수의 세계를, 타인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열린 구조로 구현한다. 한편 그 연장선에서 ‘돌봄’은 문현수 회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열쇠다. 전통 사회에서 가족이 사용할 옷이나 소품을 제작했던 생활 공예는 돌봄(노동)의 대표적인 예다. 또한 작가가 36년간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작은 재능들을 지켜왔던 것 역시 마찬가지. 문현수의 회화에서는 이러한 돌봄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돌봄이란 결국 타자를 보호하고, 타자를 우리로 포용하는 윤리이자 미학이다. 작가가 그린 사람들은 제대로 된 낯도 윤곽도 없이 나타난다. 누구도 정확히 재현되지 않지만,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얼굴로 우리 앞에 선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로 여긴다. 뚜렷이 생각나는 벗에서 조금도 닮지 않은 이방인까지 모든 이가 이곳을 스쳐 가고,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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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미술에서 특별하지 않은 주제다. 눈앞의 자연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생성을 그린 그림도 가능할까? 아마도 조지아 오키프, 헬렌 프랑크탈러 등이 들어맞는 사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현수의 《카네이션 미학》은 어떤 경우인가. 전시는 ‘자연’을 이야기하면서도 숭고미나 신비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장면에 역사성을 부여하거나 미술사를 모티프 삼아 제 위치를 가늠하지도 않는다. ‘자연’에 대한, 혹은 ‘자연의 생성’를 주제 삼는 전시라 해도 틀렸다 할 수 없겠지만,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리라. 《카네이션 미학》은 ‘직조織造’에 대한 전시다. 그리고 작가가 ‘직조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내리는 답은 직조가 세계의 ‘창조’ 나아가 세계와의 ‘화해’라는 것이다. 세계를 목적어로 삼는 두 말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선뜻 수긍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탈)근대적 진리관에 사로잡힌 까닭도 있지만, 도무지 미술이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주장은 헤겔 이후 의심쩍거나 위험한 것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그러나 전시를 보면 그 과감한 진술을 발설하고 싶어진다. 미술에 대한 맹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작품이, 미술이 여전히 세계의 ‘계시’일 수는 없는지 캐묻게 한다. 그것이 문현수가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는 미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네이션 미학’이란 단순히 교육자였던 작가의 이력에서 기인한 헌사는 아닐 테다. 카네이션은 꿈을 건네고, 꿈을 지켜준 이들을 위한 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염료가 번지는 과정을 ‘어우렁더우렁’이라는 낱말로 묘사했다. “염료가 원단에 떨어지면 색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번져간다. 우린 바로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디에 있든, 누구와 함께하든 색은 늘 다른 무언가와 서슴없이 얽힌다. 자신의 색깔만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어울려 공통의 색깔을 찾아가는 어우렁더우렁…. 그게 염색의 매력이지 않을까.”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엮임. 그리고 그 세 겹으로 비로소 드러나고 창조되는 또 화해하는 자연이라는 ‘세계’. 미가 아닌 것으로 움직이는 세속의 공간을 우리는 현실이라 부른다. 꿈을 멈춘 사람들은 현실이 전부라고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대개는 꿈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맞붙으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일, 꿈의 언어로 현실을 다시 직조하는 일은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자, 가장 기억에서 먼일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렇게 나아간다. 어우렁더우렁. 우리는 지금, 꿈이 생기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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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아름답고 정치적인 은유의 코뮌 읽기」, 『문학동네』 제16권 1호, 문학동네, 2009.
―――, 「인간의 형식」, 『문학동네』 제25권 1호, 문학동네, 2018.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기술에 대한 물음」, 이학사, 2008,
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옮김),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 문현수 개인전 《카네이션 미학》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