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자동응답_박혜수, 안부: 굿바이 투 러브

안부 ⟨Excusez-moi⟩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52×40cm 2019

1
나, 헤어질 때만 사랑을 하였다. 없다, 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뿐일 때. 나는 사라진 연인에게 가장 성실하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속삭이지 않자 아침을 잃게 되었고, 오늘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아 다섯 평 방안에만 머물게 된 나는 비로소 네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내가 너를 가졌던 사이 너는 생활의 도구였다. 옷을 골라주고 저녁을 챙기고 야음을 데우는 기계였던 너는, 부재와 동시에 충실한 연인이라는 도구적 현전의 방식에서 사라지기로 결정한다. 그 순간 경첩이 빠진 하루는 종일을 삐걱거리고, 용도 속으로 융해되었던 어떤 그는 첫날처럼 삼킬 수 없는 고체로 나타난다. 사랑의 이름으로 연인을 녹이었듯, 사랑의 이름으로 너를 응고시키어 나의 이마를 건드린다. 사랑이 만남 아래 멀어졌다가 이별 위에 다시 내린다. 사랑이 조건 없는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다행히 이제 네가 없어 나는 사랑으로 나아간다. 손안에 없는 연인. 나, 질투 없이도 너를 그릴 줄 알고, 구속 없이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부재하는 연인에 대한 예찬자이다.

용도 속에서 파악되는 한, 사물이나 사람은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목적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라져 간다. 편안한 속옷은 입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고, 고분고분한 연인과는 대화가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우리를 둘러싼 것은 그 쓰임을 충실히 배반하고, 신뢰를 과소화함으로써만 ‘눈앞에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현명해지는 시간에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여럿이 빛을 머금고, 그것을 믿지 않을 근거가 기어코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또다시 사랑으로 미끄러지는 까닭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가 사랑을 이런 방식으로 선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별 뒤 보정 속에서 사랑을 미약하게 만들었던 불행은 힘을 잃는다. 설령 그이에 대한 사랑이 재생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랑에 대한 사랑 혹은 사랑 그 자체는 지켜진다. 사물에게서 용도를 사그라뜨리고, 쓸모없음으로부터 그것을 지니지 않고서는 우리가 볼 수 없던 물질의 현전을 보여주는 것이 시학이라면, 예술은 이별과 절친하다. 안부의 사진에서 그들은 도박꾼처럼 모든 것을 잃는다. 그리고 이 탕진은 피사체를 쓸모로 환원되지 않게 종용하는 사랑의 증상이다.

안부 ⟨생각의 꼬리⟩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40×30cm 2019

2
박혜수가 기획한 잡문집 『굿바이 투 러브』에 수록된 사진은, 고인이 된 사진작가 임형태로부터 안부가 이어받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박혜수는 실연 사연과, 관계된 물품을 수집했고 이들의 사진을 임형태에게 의뢰했다. 그러나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박혜수와 임형태는 반목했다. 기획자는 헤어짐에 동반된 슬픔에 집중하기를 원했고, 사진가는 이별한 이를 위로하고 싶었다. 전자의 의도는 사물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사진으로 남았고, 후자의 이견은 사물을 풍경으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실연의 사물은 두 번이나 기록되어야 했다. 첫 번째는 초상으로, 그다음은 전경으로. 그러나 둘은 상반된 입장이기보다, 선형의 서사에 합류한다. 어찌할 수 없는 갈라섬을 이별이라 말하고 제힘으로 갈라섬을 작별이라 한다면, 실연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룩된다. 이별 앞에서 실연자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최선을 다해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실연이 작별로 나아갈 때 복구란 의미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이전의 삶보다 앞으로의 삶을 향해 변화를 매개한다.

백색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물은 카탈로그의 제품 사진처럼 단단하게 드러난다. 가슴 먹먹한 실연에도 멀쩡한 물체는, 실연자에게 상처는 오로지 외로이 감당하는 것이라 말하는 듯 보인다. 실연자를 제외한 전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홀로 파괴되어 어느 것과도 연대할 수 없는 그는 대신 하나의 가설에 도달한다. 추억이 깃든 사물이 용해되지 않고 굳어 있듯 나도 실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미래가 과거에 있다고 믿을 때 그는 여전히 이별에 머무른다. 그러나 사물이 낡은 방 안으로, 수풀로 던져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스스로를 단단하게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허물어져 가는 풍경을 따라서 사물도 함께 저무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같은 것인데 시간은 오직 폐허 속에서만 흐른다. 이때 주체는 깨닫는다. 견고한 산맥도 시간 위에서 물렁물렁하다는 것. 사라짐에 한해서 무엇도 구제받지 못한다는 현실에서 실연자는 비로소 그들과 연대에 나선다. 과거는 폐허와 사물처럼 복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이별은 곧 작별로 발음된다.

안부 ⟨The Mark⟩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6.6×20cm 2020

이별에서 작별로, 임형태의 사진이 실연을 복구할 수 없다는 그 깨달음의 순간에서 멈췄다면, 안부의 작업에선 돌아갈 수 없는 진실에 자신의 삶을 합치하기 위한 실존적 단절이 시도된다. 안부가 찍은 사진으로부터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이해는 이런 것이다. 다시 연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후에도 남은 사랑. 사랑을 더는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그 믿지 못할 사랑이 외려 길이 되는 사랑. 그 기쁜 가엾음에 대하여. 작별 이후 사랑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지탱되는 소유로서 작동하지 않는다. 떠난 이는 이제 체온도 체액도 나를 위해 선사해줄 수 없다. 이제 나는 그 어느 것도 제공하지 않는 (추상적인) 그와 살아가야만 한다. 이 시기에 사랑은 다시 발명된다. 꽃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를 꺾지 않고, 강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를 담아오지 않는다. 매일 식탁 위에서 색과 향을 품는 것 대신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존재다. 무엇이 몸을 송두리째 담그고서도 상처 내지 않고 흐르는 움직임이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을 탕진한 피사체가 사진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평면과 기하적 도형. 안부의 사진을 구성하는 원소를 거칠게 갈무리하면 이 둘이 남는다. 피사체가 그를 이루는 부품과 부속의 집합으로 간주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저 점, 선, 면으로 전부를 지시하는 추상화처럼, 화면은 전체의 기호로 합류할 뿐 특정한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여기에는 점과 점이 잇는 선이, 선과 선이 교차하는 면이, 면과 면이 조합되어 만드는 공간만이 어슴푸레 남는다. 가령 의자의 연쇄적인 나열을 찍은 〈생각의 꼬리〉가 강조하는 것은 대각으로 빗발치는 획이다. 이 선은 착석이라는 기능이 숨겨버린 것을 드러나게 한다. 피사체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프레임에서 개별적인 대상은 사라져 간다. 윤곽은 형체가 아니라 획 자신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만 남는다. 그는 이 순간 용도와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무대를 바라보기 위해 설계된 사물은, 이제 시선을 의자가 마주 본 곳이 아니라 종횡하는 획을 따르도록 만든다. 작별한 연인은 더 이상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눈이 자신 말고도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깊은 것인지 알게 된다.

안부 ⟨겹⟩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82×62.4cm 2020

이 쓸모없음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안부는 단순히 망가지거나, 식별할 수 없는 사물로서 상투적인 ‘쓸모없음의 가치’에 접근하지 않는다. 대상은 조금도 파괴되거나 변형되지 않았으며, 폐허 안으로 표면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관점과 더불어 기하적 형태로 수렴함으로써 도구적 현전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함께 중요한 것은 실존적 단절이다. 다시 말해 사물의 쓸모없어짐과 동시에 주체에게, 모든 사물의 용도를 지정해야 하는 주권으로부터의 하야(下野)가 발생한다. 멀쩡한 사다리가 〈디딜 곳 없는 사다리〉가 될 때, 그리고 의자가 수평이 아니라 뒤집어져 〈겹〉으로 집적될 때, 여기엔 쓸모없는 사물 말고도 그것을 이용할 방법을 잃은 주체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그 없이 사랑을 해야하는 존재로 내가 변화해야 하는 것처럼, 더는 손안에 있지 않고 눈앞으로 나타난 연인. 이때 눈앞에 있는 사물(혹은 연인)은 도구가 아니라 그저 불가피한 사랑 그 자체다. 이 눈(혹은 프레임)의 유일한 기능은 주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안전하지 않다.

직선을 ‘평면 위의 두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으로 규정할 때, 이 표현은 직선을 정지된 것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직선이 ‘두 점 사이를 질주하는 연속된 움직임’이라면 이때 직선은 스스로를 발생시킨다. 일반적인 시선이 사랑을 작별로써 그치는 것으로 읽는다면, 안부의 시선은 정지의 순간을 발생으로 소리 낸다. 스냅사진의 형식처럼 사물들은 다음의 어떤 움직임도 기약하지 않은 채 형태 아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복되는 기호는 그사이에 무수한 종차가 섞인 생성을 드러낸다. 〈나즈막한 외침〉에서 되풀이되는 지그재그는 우리를 보도란 용도 대신 기하적 패턴에 집중하게 만든다.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선분은 정지한 빛의 궤적이 사실 끊임없이 운동 중인 것처럼 실시간으로 발산하고 있다. 〈Solitude Shadow〉와 〈The Mark〉에서도 점은 질주를 멈추지 않아 선으로 드러나고, 회전을 멈추지 않아 원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은 프레임 안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이어질 외부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멈춰있지만 발생 중인, 또 한정되어 있지만 너머로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 태양이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죽어가듯, 정지했다고 여긴 순간 다시 시작된 사랑의 형식은 이렇게 포착된다.

안부 ⟨서로의 조각⟩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30×23cm 2020

3
안부의 사진은 직접적으로 ‘실연’과 결부되지 않는다. 그는 실연 물품을 촬영하면서 사랑에 접근했던 임형태와 달리, 실연의 모든 내용과 내내 거리를 둔다. 대신 그는 실연과 관계 맺는 사랑의 형식에 다가간다. 사각에서 모든 사물과 사람은 스스로를 잃는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는 자이면서, 스스로의 멸망을 재촉하는 존재다. 그리고 멸망을 슬픔보다 기쁨으로 체념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사랑과 예술이란 두 단어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활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진은 “친숙한 일상의 모습에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 틈을 만들고, 다시 낯설고 위태롭게 새로운 모순의 간격을 만드”는 행위다. 이 모순은 쓸모없음과 손안에 없음에도 다시 믿게 된 사랑(예술)의 증상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끝에 와서야 상실은 시작한다”. 안부는 ‘시작한다’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다. ‘있음’에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이는 친숙한 일상을 유지했던 용도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진(사랑)의 완성에서 다시 발명되는 것은 이 용도의 탕진이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이 예술을 말할 수 없다.

너를 잃고 사랑을 미약하게 만들었던 것이 힘을 잃을 무렵부터 나는 네게 전화를 걸었다. 사랑하는 동안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나는 ‘사랑해’라는 말에 동어의 응답으로서만 그것이 증명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엔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자동응답으로, 오직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말로써만 그것을 증명해낸다. 고약한 시인의 말처럼,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한다.

참조
나태주, 「너는 바보다」, 『너를 보았다』, 종려나무, 2012
서정주, 「견우의 노래」, 『귀촉도』, 은행나무, 2019.
신형철,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18.
———,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18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조재연,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_박혜수: 어디서 다시 무엇이 되어 만나랴」, 『H아트랩 결과보고집』, 2022
진은영, 「문학의 비윤리」,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함돈균, 「의자」, 『사물의 철학』, 세종서적, 2015


▲ 박혜수 『굿바이 투 러브』⟫에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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