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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잦은 예술인 영화나 연속극에서도 ‘상처’는 거의 늘 더 나은 삶에 대한 계기가 되거나, 종국에는 최소한의 어떠한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한 정상적인 지불로 취급된다.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올바른 세계가 될 수 있다는 당위를 담은 ‘상처’의 윤리학에 의거한 서술일 수도 있고, 그런 당위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영리한 왜곡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늘 우리는 타인의 상처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상처는 대체로 훌륭한 이야기가 되어왔다. 상처가 대체로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상처의 끄트머리에 자주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대부분 개인과 개인이라는 개인적 층위에서 단독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어느 지점에 가서는 개인적 삶에서 시작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개인을 불행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상처는 세계 비판을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매개체이자 보편적 정서가 된다.
그러나 상처가 삶의 경험치가 된다고 해서, 또 세계 비판의 입구가 된다고 해서, 그렇게 불행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때나 있는 흔한 것이기 때문에 소홀하거나 쉽게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죽기 위해 사는 법」, 78쪽) 상처를 경유하고, 불행을 다루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경험치가 된다면, 혹은 그게 아니라 경험치 조차 되지 못한다면, 또 세계 비판의 입구가 되어 그렇게 늘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을 이유로 더욱 절박하게 다뤄져야만 한다. 하나의 상처도 보편적인 정서의 일부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상의 것으로 세상에 유일무이하도록 남길 것. 그래서 상처 앞에 ‘누구나 다 그래’라는 말은 소금이 된다. 그 절박함 후에야 타인의 불행을 왈가왈부하는 일은 드물게 용서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상처가 유일무이한 형태로 남도록 다루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처의 원인을 안팎으로 찾고 그 관계를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는, 또 그 후에 개별성과 특수성을 농밀하게 포섭하는 것으로서는 도무지 충분해질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상처와 불행으로부터 끊임없는 열람과 탐색이라는 여전한 타인의 태도에서 벗어나 그 상처와 불행에 ‘가담’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타인의 상처를 다룰 때 그 다룸이 타인의 입장이라면 상처는 도구화된다, 그것은 이야기를 위해서 도구로 동원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입장에 서, 그 타인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오만이다. 남은 것은 하나다. 사실 우리는 그 상처와 불행에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작가 윤지현은 《Emotional Lumps》에서 타인의 상처와 불행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가해자의 자리에 처연히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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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서 주로 사용된 것은 원뿔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평평한 바닥면이 밑으로 향하도록 서있지 않았다. 그것은 꼭지점이란 얼굴을 바닥에 쳐 박은 채 존재하다가, 그것이 불편하고 불안해 스스로의 자리를 옮겨 다닌다. 작가는 그것이 세상에 가담하려고 하지 않을 때마다 타인을 향해 돌출되고 시리게 접촉되는 상처의 유발물로 여겼다. 작가는 스스로의 성격이 소심하고 적극적이지 못하다고 했고, 타인에게 응답할 때마다 경유해야만 했던 많은 염두와 고려라는 조심성들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었다고 떠올렸다. 상대에게 제 때 대답하지 못해서, 먼저 말을 걸 수 없어서, 더 솔직할 수 없어서 준 상처들이 《Emotional Lumps》의 동기가 되었다. 그로부터의 표상이 원뿔이었다. 불현듯 돌출된 원뿔에 함유된 그 어쩔 줄 몰라함이 그리고 속죄함이 전시에 부유한다.
소심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그리고 조심성까지 많은 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란 흔하지 않다. 오히려 그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반대로 그런 소심함들을 잘못이라 여기게 한 타인이 그에게 준 상처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물음에도 작가는 한사코 스스로를 속죄했다. 어떤 갈등에서나 양쪽의 잘잘못이 있다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죄는 오히려 타인을 가벼이 다루지 않기 위하여, 그 관계와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커 스스로의 잘못을 추궁하고 먼저 사과했던 어느 헌신에 닿아있다. 그래서 원뿔은 스스로에겐 뒤집혀있다던 전시 설명과는 별개로 대체로 불편하거나 불안하지 않도록 면을 아래로하고 놓여있다. 그때 보이는 것은 반목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또 타인의 상처를 형식적으로 봉합하기 위해서 잘못을 지어내는 속죄가 아니라, 진정으로 당신을 찌른 것이 이것이라는 고백이다. 윤지현의 작품은 타인의 상처에 헌신하고 해원에 앞장선다.
작품은 장지에 얇은 채색으로 이루어졌다. 얇은 표현은 깊이가 깊지 않다는 것의 반대라기 보다는 선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의에 더 가까우며, 또한 그것이 넓고 평평하다는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작품들은 대체로 프레임 안에 속해있지 않고 프레임 없는 회화들은 서로 하나의 이름을 부여 받았기에 다른 것으로 느껴지면서도 단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작품은 얇다는 표현과 넓고 평평하다는 의미가 동시에 성립한다. 그로써 관객은 작품을 관조하면서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또 둘러싸여 헌신하고 해원에 앞장서는 어느 인물의 내부에 도달할 수 있다. 한편, 선명하지 않음은 작가의 속죄에서 원뿔에 대한 어쩔줄 모름과 속죄에 대한 진중함과 진정성의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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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제일 마음이 시큰하도록 자맥질했던 것은 전시 전부가 한 그을음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All around> 연작을 볼 때 그 느낌은 더 깊어졌다. 한강의 소설 「노랑무늬영원」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109쪽) 한강과 윤지현의 공통점 있다면 타인의 상처 혹은 상처 ‘자체’를 감각화하는 데 말문이 막히게 한다는 것과 그것을 유일무이하게 다뤄낸다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상처에 헌신함과 해원에 앞장서는 동안, 그 고민과 삶 동안 작가의 심장은 새벽까지 탔을 것이다.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것으로서, 행하지 않음으로서의 가해를 찾고 숙고하고 속죄하는 동안 작품도 탔을 것이다. 작품을 생각하면 새벽까지 심장타는 냄새가 났다.
우리는 모두 상처 받으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우리는 모두 상처를 주면서 살아갈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란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내내 상처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파하면서, 제가 준 상처가 아니면서도 속죄하고 사과하는 사람들도 있다. 용산참사가 있고선, 천안함이 있고선 그리고 세월호까지 말할 수 없는 숱한 재난과 그것이 만들어낸 상처 앞에서 드물지만 자주 인간은 스스로 가해자를 자처하고 사과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실천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끝까지 남용되어도 이 말에 대한 애정을 버리긴 쉽지 않다. 타인의 상처에 대해서 가담했다고 고백할 때, 가해자가 된 그때 인간은 잠시 미웠다가 오랫동안 사랑스러워진다. / 조재연
/ 대안공간 눈 ‘새싹 이음 프로젝트’ 기고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