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었네

화가 정지현, 그는 개인전 <ONE WAY>(4. 14~5. 16 상업화랑)에 깊은 밤 풍경을 목탄으로 담았다. 사람보다 사물이 재잘거리는 시간. 인간 형상(人形)이 제 머물 곳으로 귀향한 자리에 빈 처소만이 남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한 걸음을 더 옮기는 순간 불행히도 어느 노인과 마주치고 만다. <두 개의 빛>(2021). 밤을 모르는 듯 그는 수레에 폐품을 싣고 귀향과는 먼 곳으로 나선다. 세상 누구도 수레를 끄는 노인의 안부를 물은 적 없었다. 하루를 들여 수거한 사물보다 많은 사람과 마주쳤지만, 누구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안부도 인사도 접근하지 않는 존재는 사물과 구분되지 않기에, 전시장을 나가 사람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란 노인은 도무지 할 수 없다. 그를 담은 작업조차 사물의 이름을 하고 있어 인형을 빗겨 지나간다. 정지현은 우리보다 먼저 그와 마주쳤던 모양이다. 어떤 일도 기록에 남고, 무엇도 검색만 한다면 찾을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를 유일하게 기억한다. 국가 통계 속에서 이제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력한 물증 앞에서 작품은 더 처연해진다. 절대적인 빈곤이 사라졌다고 믿는 곳에서 가난은 멀고, 드물고, 예외적인 개인의 처지로 남았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클레의 말을 달리 읽어본다. 예술의 책무는 행복만 존재하는 곳일지라도 그곳에 마지막까지 슬픔을 남겨 놓는 일이다. 불행을 기꺼이 껴안기 위해서, 슬픔에 지겹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은 여전히 세상에 머문다. 전시장을 나오며 한숨을 쉬려다 참았다. 나는 무슨 권리로 한숨을 쉬는가.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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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Ground

<디딜 곳 없는 사다리>(4. 6~5. 1 드로잉룸)를 보며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2009)을 떠올렸다.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수많은 애벌레가 등장한다.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이하 줄무늬)가 여정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 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틀림없이 굉장히 기막힌 것이 있을 거야.” 이에 수긍한 줄무늬는 다른 애벌레처럼 남을 짓밟고 밀치면서 기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만을 깨닫는다. 줄무늬는 기둥을 내려오며 이 사실을 전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다수에게 진실은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기쁨보다 자신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이었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닌 날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줄무늬는 비로소 나비가 된다. 여기서 ‘꼭대기’는 더 이상 기둥의 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먹고 자라는 것보다 더 나은 생활이 분명 있을 거라던 줄무늬의 꿈에 가깝다. 삶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남을 짓밟고 밀치며 오르는 경쟁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그런 한에서 ‘디딜 곳 없는 사다리’는 상승을 소망하는 이에게는 서글픈 낱말일지 모르나, 삶을 달리 보는 이에게는 어떤 비관도 개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희망에 어울린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사진작가 안부의 출품작 <겹>(2020)은 ‘오르기’보다 ‘밀기’에 적합해 보였다. 작업은 위계를 갈망하며 세계의 높이에 다가가기보다는 삶의 너비를 재기 위한 바퀴를 지닌다. 줄무늬는 정상에서 추락한 애벌레의 주검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쌓인 의자를 내려놓으면, 우린 눈을 맞추며 함께 앉아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동화의 말미에서 다른 애벌레 역시 지상으로 내려와 나비가 된다.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꾼 건 이런 문장이었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는 여기 함께 앉을 테다. /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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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꺼 잠에서 깨는 일_박지형: 멀고도 먼

박지형 기획, ⟪멀고도 먼⟫, 온수공간, 2021,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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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밤, 밤으로 가야 한다.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둠 안에 있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필요했던 일종의 것들을 빛을 통해 알아채 왔을 테지만, 형편에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빛은 어떤 시간이 흘러도 은닉이나 유예도 없이, 외려 은닉이나 유예를 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무지를 유지시켰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면 빛은 어떤 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빛은 이것에 합의를 초과한 어떤 사용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지나왔던 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양초란 그저 실내에 있어야 한다거나, 교통 공간은 교통 공간일 뿐이니 이곳으로 집단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일은 모두 빛으로부터의 식별에서 야기된다. 그러나 불을 꺼 눈을 잃자, 부딪치지 않던 것들과 부닥치게 된다. 거닐지 않을 곳에서 걷게 되고, 붙잡지 않을 것을 붙잡게 된다. 은밀해지려는 부빔은 이제 가능하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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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hwp

“유년 시절, 어머니께서는 청력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여기서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듣는 많은 소리를 듣지 못했고, 내가 건네는 말들은 늘 희미해진 후에야 가닿았다. 같은 것을 듣지 못할 때면 나는 내가 듣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야 했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반드시 전해진다는 말은 믿음 잃은 동화처럼 들렸다. 학년이 바뀌면 나는 친하게 지내던 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의 느낌과 기억이 그와 같을 것이란 생각은 도무지 책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해의 층위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그렇게 나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롭다는 말은 아끼기로 했다. 결국 서로에게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결론 앞에서도, 이해를 그치지 않는 일들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또 일상적 언어가 이해에 부침에 겪을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일들이 남아있는 때까지는. 쉽게 외로워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론보다 결심에 더 가까운. 예술은 그런 한에서 내 이야기 같았다. 나희덕이 마크 로스코의 <No.16>(1958)을 보고 쓴 시 「마크 로스코」(『파일명 서정시』, 2018)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마음을 소등한 자에게만 보이는/희미한 빛은/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비극을 두제곱한다. 그는 자신의 등불로는 타인의 느낌과 의미를 비출 수 없다는 결론을 알기에 이내 등을 끄고 말았다. 첫 번째 비극이다. 그러나 등이 꺼져 주위가 어두워지자,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예술의 빛이다. 그러나 결국에 그 역시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제곱 된 비극. 하지만 그에게 이제 그러한 결론은 중요치 않다. “벽이 못을 간신히 삼키듯” 이미 그는 결심했으므로. “누군가에겐 순진해 보이더라도 이해에 가닿을 것이라는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 제 삶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예술과 가까운 삶만이 저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내 이력서는 대부분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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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의 질감_박현: thedesert.xyz

Jan Adriaans, ⟪thedesert.xyz⟫, SeMA 창고,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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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운명에 대답할 수 없는 까닭은, 운명이 말을 걸지 않는 탓이 아니라 운명을 들을 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하여 참견하거나 설득에 나서는 일, 그도 못한다면, 원망을 가하는 일에는 여기선 도무지 돌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벌어져 버린 사태에 스스로가 맞춰지도록 가담하거나, 휩쓸려 가도록 스스로를 표류시키는 것뿐이다. 어떤 것도 정당화를 되물음하지 않으며, 그 무엇을 이해했는지에 관한 검토는 함구된다. 삶의 실패는 그 어떤 주장으로도 반박할 수 없다. 이 모두는 시장과 경제가 말이 아니라 단지 숫자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벙어리는 그 혼자였지만 이제는 그를 제외한 일체가 벙어리가 된다. 나머지 모두는 기술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데이터만으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눈먼 자는 그뿐이었지만, 이제 그를 예외로 한 전부가 눈먼 자가 된다. 어떤 초월적인 것과도 단절한 이후 세계는 자신을 더 많이 중얼거리게 되었지만, 언어와 감각을 잃은 이는 말했듯 가담하는 것과 휩쓸리는 것 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한다. 세계엔 수數가 넘실대며 흐르고, 데이터는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작열만을 듣고 볼 실재의 사막에 도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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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지막의 결산_안동일: 오발탄

안동일, ⟪오발탄⟫, 상업화랑,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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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효력은 결산 후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나 모두가 결산이 마쳐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헌법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지 않다고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함유한 피의 농도와 관계없이, 주권은 처음부터 국민에게 있다고 전해졌다. 신체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모두 처음부터 그곳엔 완고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헌법으로도 권력은 자유의 본질부터 부차적인 것까지 모두 다스릴 수 있었다. 거기에는 결산이 필요했다. 충분히 지불된 적 없었기에 발휘된 적 없던 시대의 효력은, 한 발의 총성과 한 움큼의 농성으로, 후불로써 처리되고 나서야 발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대가 곧바로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외려 두 개의 시대가 공존하기 시작한다. 영웅이 죄인으로 전락하는 일과 동시에 죄인의 추도식이 현충원에서 열리는 것은 그런 풍경이다. 여직 결산이 필요한 까닭이다. 결산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결산을 마치는 것은 예술의 일이다. 안동일의 ⟪오발탄⟫이 이미 낡아 바스락거리는 풍경을 현재의 시점으로 담음이란 그런 일인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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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어떻게 오지_강원제: 선택되지 않은 그림

강원제, <Unselected painting>, 60x310x70c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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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제품으로서의 작업은 한 사람의 작가’임’을 증명하기보다는 오직 그가 작가’였음’을 증명한다. 작가는 자신을 증빙해 줄 예술이 등록된 재직 증명서도, 월급명세서도 그리고 명함조차 쉽게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그는 작업 이후에 외부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그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없다. 작업 이후 작가는 그 어떤 것도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내 소등의 시간을 맞는다. 작업은, 그것이 완성되자마자 작가를 자신이 초대한 한 명의 손님 내지 관객으로 만들고 말았다. 작품이 늘 작가보다 말이 많음은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작가’임’은 오직 생성으로서의 작업, 즉 완료되지 않은 작업으로써 증명된다. 작가의 정의가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일 때, ‘하는’이라는 현재형 시제는 이다지도 엄격한 조건을 이른다. 그래서 작가는 —그가 작가임을 유지하려는 한— 많은 시간을 작업을 완료시키려는 자기 스스로와 다투며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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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_뀨르와 타르: RRRRRRRRRRR..

⟪RRRRRRRRRRR..⟫ 전시 포스터, out_sight, 2020. (포스터 디자인: 정윤하)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슬라보예 지젝 (11.10.08. 월가점령시위에서)

11이 글의 제목은 뜨거운 감자의 <좌절 금지>의 가사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에서 인용했다.
우리에게는 해안선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바다는 강으로 흐르지 않기에, 그것이 영영 삶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한다—못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코르크 마개로 닫힌 구원의 글귀나 형상이 있을 것인 한, 의무는 도무지 저버리지 못한다. 마지못해 해안선에 도착하는 비지 않은 병들. 비로소 그 병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제 발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짓고 지은 것을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었냐고는 물을 수 없다. 구원은 절망의 무릎에서 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병 안에는, 오직 흘겨 볼 시야와 성토할 입조차 잃은 절망의 나락에서 찾은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는 부재하는 목격과 증언을 갈음할 유일한 증거가 담겨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시작할지에 대해서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단지 어떻게 끝날지는 선택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해안선에 도달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근처까지 도착하는지는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달과 도착을 가지고 실패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멈추는 순간은 실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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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되는 원질_강석호, 이은주: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

강석호, 이은주 기획,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 아트스페이스3, 2020, 전시포스터

아르케로서의 물, 원자, 수數 그리고 최근의 렙톤에서 쿼크까지, 더는 분할할 수도 가감할 수도 없는 원질에 대한 발견은 끊임없이 분할되고 가감되는, 즉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치않는 진실한 것을 탐색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세계가 ‘진실’히 실재하는 것이라면 이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서 그 진실을 야기하는 물질이 있을 것이라는 태도는, 이제 가상에 접착된 미술에게도 받아들여진다. 가상이 아름다움을 지어내고, 그때의 아름다움이 진실한 것이라면, 가상의 표면 아래 사무친 것 중에선 마찬가지로 어떤 변치않는 원질이 있을 것이라는 것. ⟪정보의 하늘에 가상의 그림자가 비추다⟫는 분명 소문으로만 떠돌던 원질을 가상의 끝까지 다가가 발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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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_백지훈: Nontype

백지훈, ⟪Nontype⟫, 비영리공간 싹, 2020. 전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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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기에 의심이 가해진다 전해지지만, 때로는 확실히 믿기 위해서 절박한 마음으로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도 있을 줄 안다. 그러니 폭발은 미움 없이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것이 산산이 부서지기를 바라는 저주 같은 동기란 가지지 않고, 외려 그 폭발 이후에도 무언가 남아있기를 바라고 있다. 노도 치는 불길과 귀청을 찢는 폭음에도 기꺼이 버틸 수 있는 어떤 것이 저 재 위와 잔해 아래에 남아있기를.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비로소 본질이라고 할 수 있거나 핵이라고 여겨질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엔 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치장이나 세련됨을 위하여 겹쳐있었고, 어느새 독을 흘린 것 마냥 악취가 나 그것을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이 겨운 때가 있었다. 의심하는 자가 생겼고, 믿지 못하는 자가 생겼다. 그러나 믿고 싶기에 폭발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심술궂기보다 말했듯 절박함에 서리어 있다. 백지훈의 ⟪Nontype⟫(비영리공간 싹, 2020.11.14.-27.) 을 보면 그런 마음이 떠올랐다. 분명 여기에 무언가 남아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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