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_박혜수: 어디서 다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박혜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실연수집’ 설문 답변지로 종이학을 접은 뒤 다시 펴서 만든 러브레터를 불도장으로 태움 각 120×170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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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수 없는 갈라섬을 이별離別이라 말하고 제힘으로 갈라섬을 비로소 작별作別이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구의 것이 아니길 바랐던 이 ‘별別’의 일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전자의 별이 노도처럼 존재를 제 마음대로 어디든 도착하지 못하도록 휘젓는 일이라면, 후자의 별은 그 출렁임과 허우적거림에 대한 인정, 선택 그리고 결단의 일. 사랑 않겠다는 각오가 어김을 어김없이 만나듯 상륙은 없다. 그렇다면 이 별이 존재에게 준 책무는 사실 어딘가 도달하거나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이다지도 파도를 만드는 일인 것은 아닐까. 많은 날을 다 보내고 또 그 많던 널 보내고, 그제서야 깨달은 것은 내게 당신을 보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송구와 유출 뒤에 여전히 남을 만큼 내게 당신이 많다는 사실. 그러니 지워질 것뿐 아니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고 만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믿음이 생겨날 수밖에요. 영원? 그렇게 감상적인 단어가 세상에 남아있을 리가, 하고 의심했던 자리에 이별로써 못 믿을 것이, 작별로써 다시 믿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렇게나 사랑은 제 갈 길로 갔지만, 영원만은 이 자리에 남아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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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비약의 건조물_이여운의 회화

이여운 ⟨스튜디오 가는 길⟩ 캔버스에 수묵 73×97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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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난 흰 이빨 자욱, 부풀어 오르는 비눗방울, 밤하늘의 검은 너울, 유리의 거미줄. 달빛인지 햇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그저 여울지 못한 창백한 조명 아래, 여윈 너의 팔과 다리를 비유할 낱말을 발음해 본다. 분명 획 하나를 제외한 모든 면에 얽힌 거대한 무게를 생략해 버린 당신은, 이 순간 가장 엷고 얇다. 나는 횡행한 없는 것들을 모아 부르고 싶어졌다가, 쉽게 ‘폐허’를 모색하는 감동에는 어떤 상투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째서 풍경의 부재는 새삼스럽게 죽어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밀려가는 것일까. ‘부재’와 ‘폐허’. 나는 이런 감정과 태도를 의미하는 단어를 조금 노려본다.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너에 대해서 이 순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폐허라 말하지 않겠다. 하늘을 그리지 않아도 형상만으로 빛이 있음을 알고, 다음 장면을 볼 수 없으면서도 그림자로 시간이 줄어드는 줄 알며, 길을 그리지 않아도 문이 존재하므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맙소사 나는 무엇이든 이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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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웹진 퐁』 인터뷰_tunainforest: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웹진 퐁 홈페이지 대문. ‘퐁’은 텍스트가 이미지에 기대어 의미를 형성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아래는 tunainforest가 비평웹진 퐁에서 기획한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 중에서 필자의 답을 모은 글이다. 본 기획에는 미술, 만화, 영화, 음악 각 분야의 비평가가 참여했다.

tunainforest (이하 T) 처음으로 글을 썼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재연 (이하 J) 아마도 이런 대답은 아둔한 편에 속하겠지요? 저는 이미 몇 편의 문장들을 쓰고 난 후에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또 마음에 둔 일이 ‘글쓰기’임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첫 글을 어떤 연유에서 썼는지에 대해서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계속 쓰는 이유라면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글을 쓰게 된 이유와 다르지 않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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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차고_안민: Conscience

안민, ⟨Conscience (21수1110)⟩, 사인 플렉스지에 유채, 220×290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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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버지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이야기, 잠든 모든 이의 얼굴이 선하다고 믿는 일, 한 사람의 마음엔 한 사람 이상의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보는 일, 그리고 사랑이 죽음으로써 끝난다 해도 사랑의 주검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오래전 내가 읽은 체, 알은 체하고 눈 돌렸던 모든 장면들이 시간도 장소도 심지어 기억도 없이 살아와 끝내 희망을 선물한다. 나는 올 한 해 울지 않았기에 선물을 받는 것이겠지.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순응하고 타협했다는 말과 다른 점이 없지 않을까. 나의 절망을 남에게도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그것을 희망이란 그럴싸한 말로써 그저 삼킨.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도, 엄격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끝끝내 당신을 미워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나. 그러니 내가 예찬해야 할 대상은 이제 부정적인 것들이다. 더는 희망을 찾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해를 찾지 않으면서 절망과 미움으로써 미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벗은 그 무서운 독을 그만 흩어버리라 하겠지만,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며, 독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보는 일에 나선다. 예술의 한편은 다시 그곳에 종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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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아트랩 OPEN STUDIO 토크

H아트랩 OPEN STUDIO 첫 번째 이야기, ⟪ART NODE⟫ 포스터

연계 행사 4. 토크
– 제목: 변명과 비명들
– 진행: 미술 이론가 조재연
– 일시: 2021년 12월 19일 (일) 13:00-15:00
– 장소: 호반파크 2관 H아트랩 4층
– 신청: H아트랩 홈페이지

“내 비겁과 작음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 나를 털어놓을 때면 자주 그렇게 적었다. 변혁과 진리, 희망, 아름다움과 같은 터무니 없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쓴 것을 지키지 못하는 생이 부끄럽다. 그러나 그 부끄런 까닭에, 괴리를 오므리기 위해서 살아가나요. 언젠가부터 ‘세상은 이렇다’는 식으로 문장을 시작하지 않는다. 처지와 자격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진리를 해명하기보다는 ‘변명’하는 것처럼, 내가 못다할 비판임을 알기에 비판 대신 ‘비명’을 지른다. 비천한 곳에서도 길어낼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다. 고귀함이 가치에 닿는 일은 그 자신을 재귀로 입증할 뿐이지만, 가치가 비천한 처소에서 길어지는 것이란 ‘가치’의 평등한 얼굴을 내비치는 일임을 믿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치’의 사소하지만 완고한 증명이기를.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기다릴 수 있는 것들을 맡에 챙겼습니다. 비평이라면 좋겠습니다. 늘어놓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흐린 날, 미사일_차지량: New Home – Stay

차지량, ⟨Stay⟩, 비디오, 60분, 2021 (출처: Cha Ji Ryang)

나는 문득 자수를 하고 싶어진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장마철마다 대야와 바가지로 물을 푸던 양친을 잊고 지냄에 대하여, 익지도 않은 낯선 짐승을 뼈째로 허겁지겁 삼키고는 그 비가 타고 내려오던 깊은 계단에 게워냈던 기억의 부재에 대하여, 새벽 내 심장 타는 냄새를 맡던 가족의 얼굴을 모름에 대하여, 그러니까 그 어느 것도 내가 머물고 있지 않음에 대하여.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집에만 가져오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지. 쥐기 위해서 꺾어야 한다는 것과,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만은 가구로 재현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누구를 사랑하는 태도가 사실 끔찍하게 다르다 것이 내가 그곳을 기억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 누군가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갈 스스로 생성해내는 생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밤이나 폐허 같은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오일 대신 유채라 발음하고, 시침은 물론 형광등이 씨끄럽다는 것을 앎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이 사소한 소리들을 말미암아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집으로 가는 길마저 망각할 수밖에. 흐린 날, 미사일_차지량: New Home – Stay 더보기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_이현수: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EVERGREEN

이현수, ⟪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EVERGREEN⟫, SeMA 창고, 2021. 7. 8.~8. 1, 전시 포스터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 마이클 타이슨, 1987년 8월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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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관한 모든 지혜를 얻었기에, 쌓아 올린 그 지혜로 말미암아 비로소 결별을 짓는다.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창피한 것을 동시에 나눈 우리는 이다음에 무엇을 남기게 될지 이제 알고 있다. 서로의 가장 헌신적인 것과 가장 추한 것을 교환해온 지금. 그리고 나는 네게 마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대로 너는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충분히 노력했던 지금. 포말은 모래 위에 새겼던 모든 낱말을 이치가 예정했던 대로 지울 것이다. 잡고 있는 것보다 놓아주는 데 더 큰마음과 지혜가 필요하다지. 실험, 경험, 증명, 검토 그리고 결론까지, 시작점에는 탄생하지 않았던 현명함은 엇갈릴 이 날을 위해 이다지도 적재되어왔을까. 그러나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성숙해지기 전, 사랑의 시작점에서 영원을 기약했던 순간과 새 삶의 출발점에서 혁명의 꿈에 젖었던 순간이다. 원대하고 급진적인 사유는 오직 성숙이 부재한 순간에 존재하고 맒을 천천히 깨닫고 있다. 결실 맺는 사랑과 도래할 혁명은 미래에 있다지만, 어찌하여 이룩과 번성은 그것으로부터 멀어짐을 만드는 것일까. 또 출발하지도 않은 채로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고 마는 것일까. 시간을 거듭할 때 생기는 지혜가 무언갈 내려놓게 만든다면 차라리 걸음을 어리석음에 향하도록 돌린다. 거칠고, 미성숙하고, 비이성적이며, 비발전된 ‘시작’으로 돌아가 다시 네게 무엇을 ‘고백’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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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속에 내 잎_하므음: 종이 속 전시

하므음, ⟨창문’히’⟩,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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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부르는 표정. 당신도 한 번쯤은 부르거나 대답해본 적이 있겠지. 당신이 나의 표정을 읽고 나는 혀로써 당신이 읽은 것이 맞다 대답하는. 내 과거를 대신 기억하는 안색에 대해, 내 슬픔을 대신 앓는 낯빛에 대해, 나 대신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얼굴에 대해 그러니까 대신하여 어떤 소리를 기다리는 표정에 대하여. 이들을 마주친다면 나는 비로소 고백할 준비가 끝날지 모르겠다. 괜찮냐, 어떻냐는 물음이 마치 열쇠가 되어서 그 열쇠에 꼭 맞는 말을 발음하는 일도 있지만, 그 표정들은 물음 없이 도착해 나는 그것에 맞는 어떤 소리를 뱉고 또 발음할 준비를 마치고 만다. 건네는 대화 안에서 몇 개의 말이 겨우 남을까 하는 고민. 그러나 그 열쇠를 통해 소리가 당신의 안으로 안착한다면, 굳이 구석진 자리에 앉지 않아도 또 천천히만 식는 커피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언어의 온도가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다. 고백을 하고 밤사이 뒤척였던 것은 당신의 입에서 ‘아니’란 말이 나올까보다는, 내가 두드린 계이름과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다만 네 입속에 내 잎을 넣어 그것이 자라나고 흔들리는 순간 염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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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나는 닿지 않는 등_정의철: Look at me now

정의철, ⟪Look at me now⟫, 학고재 아트센터, 2021. 10. 12~10. 19, 전시 포스터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대리언 리더, 배성민 옮김, 『광기』, 까치,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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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에는 얼굴이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하루엔 낯을 가지지 않은 존재들이 장기적으로 오가고 있었다. 사물을 통과한 사실과 장소는 자욱으로 남아 언제든 돌이켜볼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건넨 낯은 도무지 잔류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커피 머신과 졸음을 참을 줄 아는 포스기, 그들처럼 살과 피를 가진 기계들. 인형人形 없이 운영되는 가게는 조금도 새롭지 않다.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는 인사에 이제 모두가 물음표를 떼었듯이, 혹은 녹음에 부친 인사에 대꾸가 허무한 것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파문엔 서로의 주름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이따금 당신이 달라진 게 없냐며 모습 중 어디가 변하였는지를 물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지난날과 오늘을 대차대조할 노력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도, 예민한 관찰력을 지니지 않은 연유도 아니었다. 그 물음만이 얼굴을 분실한 세계를 떠올리게 만들어, 상실의 죄책을 상기시킨다. 얼굴은 신체의 마중물이니 낯의 탈거奪去는 신체의 탈거. 그때마다 넉넉하지 않은 입을 벌린 사물들이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너도 사물이지, 너도 사물이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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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믿게 하는 예술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조심스럽다. 그것이 터무니없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었다가 조급하게 예술을 원망하게 될까 봐 그렇다. 그러나 예술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바꾼다는 이야기라면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전력으로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의 자취가 그 말을 증명한다. 도미야마는 분명 수많은 삶을 바꿔냈다. 그는 전환 시대의 투사였다. 1921년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도미야마는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며 격동의 역사를 화폭에 증언했다. 일제 강제 노역과 위안부, 탄광 노동자의 비극,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 독재, 5·18을 포함한 한국의 70, 80년대 민주화운동, 후쿠시마원전사고 등이 작가가 온몸, 온 생을 거쳐 부딪쳤던 문제였다. 그림을 보고 그림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그림이 우리를 봐주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느낌. 사람들은 도미야마를 “어디를 보아도 우리 편 하나 보이지 않는 먹먹함 속에서 우리 모습을 봐주고, 우리 이야기를 해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기억했다. 비극이 삶을 휘저어 지나간 후에도 살아갈 힘은 남아있다는 것. 도미야마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역시 이 소회와 같지 않을까. 슬픈 장면을 그릴 때면 작가는 종종 나비를 그려넣었다. 스산한 후쿠오카형무소, 강제동원 희생자의 주검, 피가 엉긴 철조망 위로도 나비는 팔랑거렸다. 비극은 결국 우리 생에서 나비 하나, 나비가 올 봄 하나 쫓아내지 못한다. 작가의 그림은 폐허 어딘가에도 꽃향기를 맡도록 만든다. 그런 도미야마가 8월 18일 별세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우리라면 조금 더 오래 예술을 믿어볼 수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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