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만-行: 구걸하는 예술》 2017.3.18.-3.26.

한입만-行_구걸하는 예술
2017.3.18.-3.26.
서교예술실험센터 1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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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만, 이라고.
언젠가 어렸을 때 한 번쯤 해봤을 것 같은 이 말은 이제 와서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어쩐지 우린, 이 말을 꽤나 당당하게 했던 것 같다. 이 말의 공간은 타인을 향한 마냥의 굴욕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당신이 어쩌면 다 먹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을 대신 해결해주겠다는 근심 있는 배려와, 한 입 정도뿐 지나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자존심과 뻔뻔함이 있었다. 그 한 입을 통해 만족감을 얻은 내 얼굴로, 당신은 선량한 뿌듯함에 충만했고, 나는 당신의 표정에 찌꺼기 같은 굴욕마저도 잊을 수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모종의 한 입 이상의 가치가 생성되는 듯했다. 혈액형이 무엇이냐 묻고 다른 것을 확인하고도 한 입을 내어줄 때 우리는 차이를 횡단하고 생명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한 입만’은 그렇게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지속해오면서도 또 한 개체가 가장 최초로 실행하는 정치적・경제적 그리고 계급적인 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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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빈곤해지자 예술은 다시 빈곤해진다. ‘산다’는 말이 ‘살아간다’가 되고 그것이 다시 ‘살아낸다’로 바뀔 때쯤, 그러니까 그렇게 조여지는 순간마다 늘 손쉽게 줄이거나 소거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이었다. 시디를 사지 않게 되고, 가던 극장, 공연장을 줄이고 전시를 보러 가지 않게 될 때, 이윽고 예술은 공간과 거리를 잃는다. 이때 예술은 비로소 ‘생존’엔 도통 쓸모없는 것이란 것을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술은 어쨌거나 잉여 같은 남은 것들의 함유물이거나 충적지라는 것. 그리고 처연해진 예술이 돌아와 공간과 거리를 찾으려고 할 때, 엄격한 세계는 예술에게 윽박질렀다. 네 쓸모를 증명하라. 쓸모없음의 함유물이자 충적지였던 것을 쓸모로 되돌리라니. 한 편의 예술들은 그동안 그래서 분주했었나 보다. 그러나 예술이 증명해야 할 것은 그것의 쓸모가 아니라 쓸모없음의 가치가 아닐까. 생존만을 얘기하고, 쓸모만을 알고 있는 세계에서 쓸모없는 것이 갖고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 그때 쓸모에 대하여 가난한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존재할 이유 하나쯤 인정해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예술은 거리에 나가 ‘한 입만’을 行했다. 타액을 거친 가장 쓸모없어진 것들을 가치로 이행시키고 싶었다.

그러니 꼭 이 전시가 쓸모없기를 바란다. 여전히 쓸모에 가난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가치 있기를.

유감하는 미학_파레르곤과 이코노미메시스 이래로 칸트 ‘미학’ 읽기

, movi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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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큼 많은 소설, 전시, 공연, 음악 등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미’ 많은 시가 쓰여졌고, 많은 노래들이 불려지고 그리고 많은 전시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술가들은 차고 넘치고 또 생성되며, 예술에 유례없는 화폐가 삽입된다. 아 이거슨 인류 역사에는 절대 없었던 존나 아름다운 세계다. 그리고 비로소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요구하고 명령하지만, 동시에 세계는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든지 충분하게 존재할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세계가 아닐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힘도 절대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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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 빈 밤에 기억이 와있어_단식광대: 새벽달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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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본적(本籍)은 아마도 시(詩)겠지만, 노래가 기어코 시에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택한 그것은,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시는 읽는 이의 시각과 정신을 온전히 소유해 제 것으로 만든 후에야 그 의미에 어렵사리 도달하게 만들지만, 노래는 듣는 이의 청각과 정신을 제압하지 않으면서도, 듣는 이가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함께 듣든 무엇을 행위하든 상관없이,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노래의 몫을 다한다. 다시 말해서, 노래는 배경 음악의 쓰임새처럼 소리를 전달하면서도 다른 소리를 빼앗지 않고, 다른 감각과 행위·정신에 공유와 연대에만 종사하는 ‘사적 소유’의 해방을 앞서 담지한다. 그리고 이점은 시와의 결별 이후의 노래가 겪은 성숙이면서도 또한 거의 모든 예술과의 차별됨이라는 점에서 노래가 가진 본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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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제 병이 깊었나,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김승희 시인은 희망이 외롭다고 쓴다. 희망은 좀처럼 드물게만 놓여있어서 외롭고, 또 그것 때문에 맘 편히 망가져버리지도 못해 외롭다는 것. 그래서 비로소 광장이 된 거리가 제공해주는 것은 징후나, 미래따위의 낱말이 아니라 차라리 절망같은 희망이다. 광화문 끝까지 희망은 드물고, 드물게라도 있어 누구도 맘껏 기대하지도, 맘껏 절망하지도 못하는 어딘가 얹힌 것 같은 낯으로 우리는 서있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낱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살리려는 것은 그것이 앞으로의 좋은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꺼이 낯들은 희망을 마련하고자 ‘지날’ 시간에 헌신한다. 그렇게 시인의 끝맺음대로 기꺼이 “희망은 종신형이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_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ㅣ押見 修造, 惡の華 중에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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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고인석에 앉았고 곧 판사가 들어온다. 이제 재판은 시작된다. 그런데 판사가 기침을 참기 위해 수건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뿔싸, 판사가 감기에 걸렸던가. 이번엔 판사가 배를 어루만진다. 젠장, 판사는 오늘 점심을 거른 것 같다. 그는 재빨리 그의 변호인에게 속삭였다. 판사는 독감에 걸린 게 틀림없으며, 저 꾀죄죄한 피부를 보니 잠도 못 잤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입맛이 없어 점심까지 걸렀을 것이 분명하다. 독감에 걸리고 점심도 안 챙겨 먹은 판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니 혹시 몸은 괜찮은지, 점심은 드셨는지 물어보라. 변호인은 애써 그의 고객을 진정시켰지만, 결국 그는 그의 예상대로 재판에서 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의로운 법 집행을 위해서 모든 율사(律士)는 재판마다 건강검진과 수면 체크와 의무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기로.

그리고 세계에서 겨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판사를 사적인 생활을 가지며 식사와 건강 따위를 걱정해야 하는 실존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 존재는 우리에게 걸어 다니는 법전이거나 기껏해야 숨을 쉬는 법의 화신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커피숍의 알바생은 걸어 다니는 커피 머신일 뿐이며 은행 창구 직원은 숨을 쉬는 ATM기 등등으로, 우리에게 인간은 그저 살아있는 사물로 현상(現像)된다. 우리는 그 사물에 엔간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세계는 유지되며 우린 그렇게 유지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건강과 식사를 점검하는 불필요한 물음과 의심을 두고 살아야 할 테니, 효용과 효율이 미덕인 세계에서 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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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발제

지금 예술이 때때로 쓸모 없거나 침묵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기. 우리가 비록 서로를 의심하고 때때로 죽음에 이르도록 증오할지라도 그러니/그래도/그러므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한 줌의 지식을 가지고 발제를 맡게되었습니다. 오는 30일, 경의선 광장에서 “영원히 예술을 포기하지 않기: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입니다.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난민을 샘플링_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아르코미술관, 전시 《New Shelters: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포스터, 2016

철학은 그저 부유물이다. 그것은 그래서 구체적인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쉽게 희미해지고 힘을 잃는 듯 보이지만 늘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매개하여 관계하며 어느 때에 가서는 장소를 가지기도 한다. 분명 그것은 드물지만 자주, 장소를 갖는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은 여전히 혁명의 공기가 부유하는 곳이며 민주주의란 철학이 거주지를 마련한 장소이다.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은 노동이 해방의 계기이면서도 정치의 제거할 수 없는 불변항임을 여전히 증명하는 거주지이다. 우리의 장소도 다르지 않다. 광주의 금남로부터 명동 성당, 서울역 광장들에는 모두 해방과 민주주의가 부유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연루되지 않은 장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철학을 거주시키고 있다. 도로, 병원, 학교, 극장 그리고 아케이드까지, 모든 장소는 어떤 철학을 소유하거나 어떤 철학을 배제시키고 밀어낸다.-이러한 측면은 푸코와 벤야민, 데이비드 하비 등의 저작에서도 발견된다- 만약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어떤 철학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장소에 철학이 부유하거나 거주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감지하지 못하는 ‘사적소유’만이 관련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들의 철학이 부유하는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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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실연이 알고 있는 혁명_다자이 오사무: 사양(斜陽)

Gerhard Richter, Betty, 1977

두 개의 문장이 있었다. 하나는 1845년 봄에 마르크스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라 쓴 것이며, 다른 하나는 1873년에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 1」)라고 적은 것이었다. 문장은 작가보다 말이 많아, 장르도 목표도 다른 두 명제는 각기 창궐하면서 마침내 조우하여 새로운 명제를 만들어냈다.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하여 삶은 바꿔야 하며, 삶을 바꾸기 위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내 사랑이 불현듯 유산된 것은 ‘새’ 사랑을 납득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이니 다시 말해, 사랑이 다시 발명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즉각 응답한 것은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고 했던 아방가르드였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이 명제는 삶에 어느 언저리에서도 정치를 그리고 대문자로 쓴 정치일지도 모를 ‘혁명’을 기어코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 씨팔 이게 다 세상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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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유다_보르헤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Andres Serrano, , 1987

⎪ “타락에 확신이 있는 듯 했다.” -토머스 E.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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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야? 배신을 마주한 사람은 이 말의 주인이 되는 것을 늘 피할 수 없다. 그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모든 스스로를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때 상대는 그 말을 망설였었구나, 불필요했던 그 행동을 해야 했구나 하면서. 이제 그가 이해했던 것은 그가 제일 잘한 ‘오해’가 되고, 그가 했던 미안한 오해들은 그가 제일 잘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가 쥔 결과물들이 사실은 거짓된 결론들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배신이란 ‘사건’의 서사를 파악하며 인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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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상실을 대하는 태도_이준익: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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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를 보는 내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의 하루키의 환영과 싸워야했다. 그 숲과 동주는 많은 유사점이 상실이란 주제로 저들을 대위했다. 시대가 일으키는 불화에서 시대를 지키는 것도, 시대에 저항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고 그저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것을 솔직히 갈음하는 두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닮아있었다. 와타나베 토오루가 놓여진 시간은 일본의 화려한 고도성장 뒤에도 그대로 보존되어있던 맨얼굴 즉, 파시즘과 전체주의 적폐에 대한 저항 운동이 활발했던 전공투세대(全学共世代). 그러나 그는 맨얼굴을 인정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모두 거절한 채로 인정과 저항 두 태도를 포함한 시대가 스스로에게 상실시키는 문제에 천착한다. 윤동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시대의 어느 편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시대가 상실시키려하는 꿈, 사랑,  서정에 천착한다. 그러나 알듯이 문제는 그들이 맞이하는 풍경도, 결론도 모두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물음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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