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의 맹주, 대안 마켓의 에너지_아트 자카르타 2024

◼︎ 『아트인컬처』 2025년 4월호

아트자카르타 전경

“아트자카르타에서 당신은 도시 자체가 곧 예술인, 자카르타(Jak-art-a)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트자카르타 예술감독 에닌 수프리얀토가 2019년, 행사 개최 10주년 맞이 리뉴얼을 발표하면서 던진 포부다. 그가 예고한 혁신은 아트페어 현장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느 미술장터나 홍보 포인트는 비슷하다. 세계 미술시장을 주름잡는 메가 갤러리의 참여와 블루칩 아티스트의 출품. 즉 글로벌리티의 확보가 흥행의 열쇠다. 그러나 아트자카르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로컬리티’에 방점을 찍었다. 어디에나 있는 동시대미술이 아니라 자카르타만이 선보일 수 있는 고유한 흐름을 제시했다. 인도네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작가와 갤러리에 집중하면서, 이들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도록 지원하는 플랫폼 역할을 강조했다. 특별전 역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이번 행사는 이러한 전략이 본격적으로 결실을 맺은 자리였다.

아트자카르타가 체결한 주요 파트너십은 리드 파트너 4곳과 메인 파트너 14곳이다. 메인 파트너 없이 리드 파트너 한 곳(KB금융그룹)만을 둔 키아프와 비교하면 현저한 차이다. 미니, UOB, 줄리어스베어 등 글로벌 기업의 투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지만, 눈에 띄는 부분은 덴파사르 인도네시아국립예술대, 발리 유진미술관, 쿠알라룸푸르 국립미술관 같은 미술기관이다. 아트페어에 공공 단체가 서포터로 나서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아트자카르타가 기업 중심의 미술시장이 아닌, 지역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플랫폼이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총감독 톰 탄디오는 “우리는 국제 아트페어라기보다 지역 박람회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양한 배경의 미술인이 각자의 전문 지식과 경험, 네트워크를 활용해 팀을 형성하면서 시작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트자카르타는 처음부터 작가, 컬렉터, 큐레이터 등 예술인이 주도해 왔다. 수프리얀토 역시 독립큐레이터다. 오늘까지도 핵심 운영진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공동체 운영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아트자카르타 전경

민간 네트워크, 공공 지원을 뛰어넘는

부스전 역시 이러한 특징을 시각적으로 풀어냈다. 특히 인도네시아 전통예술이 현대적인 감각과 결합한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오색 천으로 뒤덮인 대형 섬유 설치물, 섬세한 손길로 조각된 나무 패널, 그리고 바틱 기법을 차용한 회화 등으로 지역적 뿌리를 동시대적으로 해석하려는 흐름을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대표 작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에코 누그로호(Eko Nugroho)는 인도네시아 와양(Wayang) 인형극을 팝아트로 번안한 회화와 태피스트리를 발표했다. 이 구스띠 아유 까덱 무르니아시(I Gusti Ayu Kadek Murniasih)는 신체와 욕망, 여성의 주체성을 바틱 문양과 민속 공예와 결합해 도전적인 메시지를 담아낸다.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신체 형상은 와양(Wayang)에 대한 재구성이다. 디키 탁다레(Dicky Takndare)는 전쟁의 공포를 시각화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희망을 담은 신작 시리즈를 선보였다. 인도네시아 전통 민담, 동화, 상징 등을 결합해 현실의 불안을 환상적 이미지로 전환했다.

한편, 아트자카르타의 특별전은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의 역동성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하이라이트는 대규모 장소특정적 설치작품으로 꾸린 <AJ Spot>전. 아트자카르타가 장터를 넘어 예술실험과 담론을 형성하는 공론장 역할을 수행한다는 목표가 분명히 읽히는 전시였다. 이완 유수프(Iwan Yusuf)의 <Air Pasang>은 마나도에서 수집한 어망과 해양 폐기물을 엮은 조각이다. 바다에 버린 쓰레기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과정을 형상화해 인간과 환경의 순환 관계를 드러냈다. 샤이풀 가리발디(Syaiful Garibaldi)의 <Antara Muara〉는 자바섬의 해수면 상승을 다뤘다. 현장에서 모은 폐목재,
균사체 가죽을 활용해 점차 사라지는 해안 마을을 재현했다. 위태롭게 세운 구조물을 기후 위기로 서서히 잠겨가는 수상 가옥에 빗댔다. 티모테우스 앙가완 쿠스노(Timoteus Anggawan Kusno)의 〈Dismantling Nostalgia〉는 식민 시대, 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역사 왜곡을 꼬집는다. 평화로운
농촌 이미지 사이에 당시의 억압적인 현실을 삽입해 노스텔지어의 이면을 폭로했다. 티스나 산자야(Tisna Sanjaya)의 〈Ganjel〉은 개인의 서사와 공동체의 역사를 겹친다. 오래된 편지, 졸업장, 정부 문서 등을 조각화해, 예술과 사회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구했다.

유디 술리스티요와 물야나의 컬래버레이션 작품. 술리스티요의 조각 아래 물야나의 산호 뜨개를 설치했다. 갤러리젠1 출품작

<AJ Scene>전은 콜렉티브, 독립 스튜디오, 프로젝트 팀을 조명하는 섹션이다. 예술가가 직접 운영하는 공간과 창작 공동체를 중심으로 동남아 미술생태계와 풀뿌리 운동을 강조했다. 아티스트가 제작한 굿즈와 아트북도 판매했다. 작품이 주가 되는 부스와 달리, 작가가 직접 방문객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갤러리 중심의 기성 구조에서 벗어나 창작자와 감상자가 직접 교류하며 대안 생태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 외에도 <AJX>전에는 인도네시아국립예술대와 유진미술관이 컬렉션을 선보이며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망했고, <VIP 라운지> 특별전에는 인도네시아 대표 작가 수나료(Sunaryo)의 신작을 소개했다.

인도네시아는 매력적인 시장이다. 인구가 2억 6천만 명이 넘는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고, 평균 연령이 29.7세에 달하는 젊은 국가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컬렉터 수가 5천여 명에 육박한다. 경제 성장과 함께 컬렉터층이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런던 테이트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등이 인도네시아 작가 컬렉션을 확장하면서 국제적인 위상 또한 강화되는 추세다. 정부 지원이 미미한 점이 가장 큰 한계로 꼽혔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이 강점이 되었다. 공공 자원에 의존하기보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민간이 미술씬을 주도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 갤러리, 컬렉터, 큐레이터가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자생력을 확장해 왔다. 콜렉티브 루앙루파가 카셀도쿠멘타15에서 선보인 공유 경제 ‘룸붕’이 미술시장의 대안 모델로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다.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정부 기금 의존도가 높고, 컬렉터층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우리 역시 지속 가능한 미술시장을 만들기 위해서 구조적 변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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