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순을 해결해주는 데 늘 주선에 나섰던 변증법도 죄의 부피를 구할 순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지 모른다. 이별을 지으면서 나는, 늘 그 말에 가책받아야만 했다. 그때의 말이 거짓이었냐는 상대의 추궁 앞에서 대꾸는 항상 주춤거렸다. 그 추궁에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그때는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하고 싶었지만, 아뿔싸 ‘그때’라는 말과 ‘영원’이라는 말은 도통 섞이지 않았다. 영원이란 것은 결국 순간의 진심을 무척 강조하기 위해서 ‘너무’라는 부사를 갈음하고자 등장한 수사에 불과했을까. 인간은 다른 사람과 살아가기 전에 스스로와 살아가야 한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이란 말을 꺼냈을 때, 스스로에 대하여 전부 파악할 수 없을 작은 신체가 진심이란 말을 꺼냈을 때, 그 말은 인간에게 영원이란 개념으로 할당된 ‘영혼’을, 그리고 실재라는 개념으로 할당된 ‘생’을 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혼과 생을 건넨 말이 거짓이라면 그땐 정말 ‘나’와 살아가기가 힘들었고, ‘나’로 살아가기가 힘이 들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은 늘 인간을 괴롭혔을 것이다. 누구는 필멸의 존재고 유한한 존재가 영원이란 개념을 손에 넣은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알(할) 수 있는 토대를 지니게 된 것의 자랑스러움을 전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냥 손에 넣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영원과 단호하게 선을 긋는 냉소적인 자들이 짐짓 참신하고 용기 있는 척, 그리고 인간을 염려하는 휴머니스트인 양 온통 시대를 기웃거렸다. 영원한 것을 좇지 말고 이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라고. 그것에 대한 관심은 되려 삶을 척박하게 하고, 행복을 벗어나 불우하게 만들며 결국엔 획득할 수 없는 것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다 소득 없이 생을 마감하게 할 것이란 정 있고 섬뜩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차라리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욕망이거나 신경 작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소식에도 대꾸는 주춤거렸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결코 이 순간, 유한한 정도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영원이 아니라면 당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에 가까웠고, 그 사실에 안심했다.
2
바디우(Alain Badiou)의 『사랑예찬』은 진리의 절차로서 사랑에 관한 사유를 요약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덧붙여도 된다면, 이 저작은 보편의 불가능성 내지 그것의 추구가 가져올 생을 부정하는 불행에 대한 비판을 기각하는데 신경을 바치는 작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랑은 진리의 절차를 따른다(32p). 어떤 것이 명명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다수에서 우연히 착수되고, 그들이 일으킨 것이 선언을 통해서 명명되며, 필연 지향적인 충실성을 갖고서 사건이 될 때 진리는 현전한다. 이 두 문장은 고답적이고 만연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버둥거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벌써 이 절차에 관해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도착해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진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일지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53p) 사랑이 철학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철학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준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거나 사랑을 확인한 후 물었다. 어쩌다가 나(너)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러나 그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해도 우리는 사랑의 원인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과는 만나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서 묻는 일은 이미 사랑에 빠지고서야 일어나기 때문에, 그때의 물음에 대한 답은 동어 반복에 가까워지고 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대로 그가 사랑받을 만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말들을 간추린다면 사랑은 그 규칙들을 고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늘 ‘우연히’ 시작된다. 사랑의 방정식 따위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반전이 존재한다. 우연히 시작된 사랑은 사랑임이 선언될 때 고정되어 ‘필연’이 된다. “만남은 진정 사랑과 우연의 놀이일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놀이는 필연적이기도 합니다.”(53p) 복도에서 드물지만 자주 마주치는 것, 같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 외딴곳에서 조우하는 것까지, 어떤 감정이 사랑으로 식별되었을 때 우연으로 우리를 엄습하던 그것들을 우리는 필연으로서 대하게 된다. 우리는 그때 필연을 그러니까 운명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운명이란 상상적이고 또 그렇기에 허구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허수(虛數)인 운명이 상수(常數)가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미지수들은 도무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운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풀리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다. 그렇기에 모든 초월적인 버팀목과 단절한 근대인이 감히 운명을 사유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좋음, 귀중함과 같은—때로는 썸이란 단어조차도—우리에겐 사랑을 대체하거나 사랑을 분화할 수 있는 말이 적지 않게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한사코 그 복잡하고 지난한 것이 반드시 사랑이길 이름 붙인다. 특정한 사람이 다른 특정한 사람을 만나는 일에, 이 사랑은 전에도 미래에도 없을 다르기만 한 차별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차별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의지한다. 그리고 이윽고 ‘우리 둘’이 하는 사랑이 ‘타인의 둘’들도 역시 하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사랑은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취향”(17p)일 때 보편적인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때 보편이란 존재를 인식적으로 인식하고 느낌적으로 느끼며 확인하게 된다. “사랑이 보편적인 영향력을 지니며, 실현 가능한 보편성의 개인적 경험이자 철학적으로 매우 근본적이라고 말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27p)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타인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며, 모두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의지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차이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차이로 이루어진 경험 위에서 다시 인간이 보편을 믿는 일이 발생한다.
우연이라는 근거 없음, 차이가 그대로 존재하지만 차이를 결코 부수지 않는 방식으로 보편을 담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정체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 진리의 정체이기도 하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의 독특한 정체는 그것이 ‘선언’과 ‘강제’의 형식을 띤다는 것이다. ‘선언’은 여기서 의견과 구분되는 이름이다. 우리는 진리라고 불려질 것들에 대해 토론에, 실험(실증)에 붙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의견 혹은 합의와 결부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가령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평등한지 아닌지를, 다른 이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지 말지를 토론하는 것은 오히려 반-인권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의 특수함을 묻지 않고 평등히 대하고 있는 ‘중’에만 평등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선언된 이후에 차이를 따지지 않는 것으로써—의견을 거치지 않은 것처럼— 차이를 외면하고, 무차별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전체에게 ‘강제’된다. 여기서 강제는 누구 하나 그의 정체를 고려하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과정에서 차이는 제거되지 않는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유가 발생하며, 차이를 질료로 해서만, 그것을 가로질러서만 진리는 발생한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저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다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나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동일성이 세계에 속한다는 것, 사랑은 바로 이 순간 동일한 하나의 차이가 된다는 패러독스를 저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존재하며,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사실을 약속합니다.”(34p)
평등이 하나의 진리로서 여전히 간주되는 이유는 지속적으로 그것이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의 의미가 온전히 결산되었다고 여겨졌을 때마다, 이제는 만족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할 때마다 평등에 대한 사유는 다시 문제적이 된다. 정치적 평등을 결산한 이후에는 사회적 평등이, 성차의 평등을 결산한 이후에도 다시 성차의 평등이 항소된다. 그것은 평등이란 진리의 지속성이자 영원성이다. 평등이란 개념이 있는 한 그것과 세계를 대조했을 때 세계는 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것이 된다. 그래서 세계는 평등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같은 일이 사랑에도 반복된다. 사랑은 교환성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마땅한 반증이 된다. 사랑은 “서로의 이익만을 챙길 단순한 교환처럼 인식되지 않으며, 미리 수익성을 기대하고 진행되는 투자처럼 장기간 계산되는 것이 아니”다(27p). 그런 면에서 사랑은 세계에서 위험한 일이고, 세계 안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그래서 세계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을 관리하기 위해 정치의 지평에서 국가—정치를 세계 내부의 일로 간주하는—가 존재하듯 사랑을 관리하기 위해서 사랑의 지평에 가족(제도)이 존재한다(66p). 이 때문에 사랑은 세계의 형편과 이치를 따르지 않는 “최소한의 코뮤니즘”(98p)라는 이름이 덧붙여질 수 있으며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라는 랭보의 명령은 사랑이 온전히 지켜지기 위해서 “삶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라는 말로 응답될 수 있다.
3
세계의 표면에는 우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 말하듯이 모든 것은 다르기만 하다. 인간은 유한하며 필멸의 존재다.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것이겠지만 운명, 보편 그리고 영원은 세계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사랑은 그 말들을 모두 알기에 그 반대도 알아 버리게 된다. 의지해왔던 모든 초월적인 것들과 자발적으로 단절했을 때 우리 근대인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유한한 것 사이에서, 가능한 것과 다르기만 한 것 사이에서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생애 동안 인생 자체, 즉 산다는 것과 싸우며 지낸다. 근대 이후의 위대한 예술들이, 거대 담론이 아니라 소박함 위에 머무르는 것이 그러한 탓이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나 자명한 악과 싸우는 투사들이 아니라 기껏해야 타인과 싸우거나 내적 갈등을 일삼는 신경증에 걸린 영웅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가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 그저 제 인생이 제자리에 돌아가기를 바랄 뿐.
그러나 가능한 것들을 아(하)는 것만으로는 생을 감내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사랑이 그렇다. 가장 사적이고 사소한 것이지만 사랑은 불가능한 것들을 알(할) 수 없는 한에서는 시작되지 않고,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한다(100p). 불가능한 것을 믿는 한에서 우리는 생에서 드물게만 찾아지는 ‘의미’를 잠시간 만나게 된다. 그때서야 우리는 인생 자체와 싸우지 않고 세계 자체와 싸울 수 있다. 표면과 관계없는 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늘 땅에 발을 내딛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바다. 초월적인 것과 다시 화해하는 순간에서야, 인간은 세계에 있어야 할 것들만 마땅히 있는 그대로의 낡은 세계를 수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세계와 맞서는 힘을 얻는다. 인간은 생을 사랑하며 살기보다는 생을 극복하는 가여운 어리석음 속에서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사랑을 해왔다, 가엽지만 사랑스럽게도.
그러니. 이제 종종 미뤄왔고 드물게 고대했던 대꾸를 할 때가 되었다. 모순을 해결하려고 애쓰지는 않겠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말을 증명하지 않고 영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약속했던 모든 자격을 끝끝내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않겠다. 행복을 수탈당할 것이라는 말에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이는 “온갖 위험에 노출된 사람”(19p)이며 사랑은 “우리의 몸을 복종하게 만들고 거대한 고통을 유발”(95p)하겠지만 어떻든, 누구에게든 행복보다는 불행이 창궐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존재할 불행들을 위해서 그러나 그 불행의 발원지를 사랑이게끔 만들기 위해서, 바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상처받기 위해서 살겠다. 그렇게 기꺼이 불행과 머물 것이다. 영원이란 말이 모순이 된 이후에도 ‘사랑’은 내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영원’이란 낱말도 보호되었을 것이다. 영원히 영원을 포기하지 말기.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나는 보랏빛이 좋다. / 조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