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고 싶어 하는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밤, 밤으로 가야 한다.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둠 안에 있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필요했던 일종의 것들을 빛을 통해 알아채 왔을 테지만, 형편에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빛은 어떤 시간이 흘러도 은닉이나 유예도 없이, 외려 은닉이나 유예를 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무지를 유지시켰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면 빛은 어떤 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다. 빛은 이것에 합의를 초과한 어떤 사용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지나왔던 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양초란 그저 실내에 있어야 한다거나, 교통 공간은 교통 공간일 뿐이니 이곳으로 집단이 내려와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일은 모두 빛으로부터의 식별에서 야기된다. 그러나 불을 꺼 눈을 잃자, 부딪치지 않던 것들과 부닥치게 된다. 거닐지 않을 곳에서 걷게 되고, 붙잡지 않을 것을 붙잡게 된다. 은밀해지려는 부빔은 이제 가능하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
감각이 사유를 이행하는 형식으로서 ‘경험’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감각이 감각으로 지각이 지각으로 머물거나, 행여 더 나아간다 하더라도 느낌에 그칠 때, 현실은 손 틈새로 얄궂이 흘러나간다. 그리고 이 유실은 현실을 사유에서 누락시키는 것 이외에도, 그것을 움키고 흔들 수 있는 역량조차 잠잠히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에는 늘 그 사물이 정해진(합의된) 대로 보도록 만드는 주관적 매개가 관여하고 있다. 어떤 사물이 양초로 식별된다는 것은 그 사물을 ‘양초처럼’ 보도록 만드는 시각 체제가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운동적 의미의— 사유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주어진 것으로, 의식도 과정도 없는 오직 이들의 부재’로써’만 행위하게 만든다. 반대로 사유로 이행되기 위해서 경험은 여기에 관여하는 빛을 거두는 외도外道를 경유해야만 한다. 프레임 내부가 아닌 바깥을 증명하는, 시간을 당기는, 그리고 기어코 세계를 부정하는 외도. 이 모든 외도들은 빛을 거역拒逆하는 외부, ‘어둠’에 의탁하고 있다. ‘멀고도 먼’ 어둠이 발자욱을 지우니. 다른 곳으로 걷겠다.
2
모든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된 현실을, 도리어 모든 답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려 버리는 것. ⟪멀고도 먼⟫(온수공간, 21.01.30.-03.03.)은 그렇게 나서는 기획이다. 현명한 이들은 객관적인 정의(답)란 항상 어려운 일이며 불가능하다고 전한다.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고답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라는 성찰의 지점까지 미루어 나아간다면, 답은 윤리마저 쥐게 된다. 그러나 두려운 일은 이 현명한 답을 종착지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그저 정박하는 데서 야기된다. 그로부터 우리가 움킬 수 있는 것은 경험이 부재하는 상황과, 분실한 현실이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니 이 답이 지니는 가치는 불가능이 종착지가 아니라, 외려 기항지寄航地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빛나게 된다. 원근법이든 사진이었든 그 이상의 어떤 기술의 발명도 갈망하던 실재를 귀환시키자마자, 결국 —그러한 성취마저도— 실재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동시에 증명하고 만다. 그러나 이 모순만이 예술이 이제는 끝났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곧바로 다시 예술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소의의 <낭독하는 이름>은 여행 중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의 담화를 영상으로 다룬다. 그들은 모두 여행의 이유를 묻거나 답하고, 그 내역은 지루함, 막막함, 잊기 위함으로 간추려진다. 그러나 이 내역은 물음에 대한 답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도 해명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지루함과 막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기억을 잊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갖고 있지만, 이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서술하지 못하고 결국 “저는 모르겠어요”나 “아무 일도 없었어요”라는 말로써 그치고 만다. 이는 결국 사유로 이행되지 못하는 ‘느낌’의 앙상한 처지를 확인시킨다. 그렇기에 그들은 의식 없이 빛으로 선별된 색의 공간과, 그 공간이 제공했던 경험 없는 일상에 대하여 한사코 이별을 고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로 가는 그들의 색은 산뜻함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흑백. 이 색 없음은 기존에 의식 없이 감각에 주어졌던 수동적인 색감과는 이별하겠다는 여행주체의 의지다.
그러니 이소의의 <낭독하는 이름>이 알리는 것은 이런 것이다. 빛이 만든 유색有色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 즉 느낌을 초과해 경험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은 그토록 가시적인 것을 분실해버리는 경험이라는 것.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일은 이러한 사건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이다. 전시의 후반부에 배치된 <낭독의 이름>이 가장 먼저 서술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큐레이팅의 서사는 어둠이 성취한 결과에서 어둠의 시작점을 향하는 것으로서 어둠의 역량을 증빙한다. 그리고 이 역순행적 전개는, 전시가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만든다.— 사유로 이행되는 경험은 먼저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행해진다. 이는 더는 의식 없이 혹은 주어진 대로 세계를 경험하지 않겠다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최초의 선언이다. 영상에서 연우는 이렇게 말한다. “다 잊었는데도 못 돌아가고 있네요. 안 돌아가는 거겠죠. 돌아가도 외국인처럼 살 것 같아요.” 어둠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연우의 말을 차미혜의 <공중 조각>이 잇는다.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이 없어지고/돌아서면 다음으로 연결되고/쥐었던 것과 놓았던 것은 어느새 달라져 있어” 외국인처럼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할 테다. <낭독하는 이름>이 빛으로부터 이별을 고하고 어둠에 진입하는 어떤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면, <공중 조각>은 이후에 조우하게 되는 낯선 세계에 대한 경험이 담겨있다. 영상작업인 <공중 조각>은 화면에서 이미지나 문장을 슬라이드한다. 초반부에 흑백조로 된 이미지가 후반부에 검은 바탕 뚫어내고 색을 지닌 형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가시적인 것의 분실을 자처했다가 비가시적인 것을 다시 가시화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잡아당기는 담화에 가까운 독백이다. 발화는 청자를 전제한 대화체로 전개되지만, 단 한 명의 화자로 이루어지는 이 독백은 주체에게 의식, 사유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화자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고 있다. 다만 ‘스스로’는 화자와 더는 동일시되지 않는다. ‘스스로’는 이제 대상화(객관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대상인 ‘스스로’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화자가 ‘스스로’에게 말 건넴은 세계를 향한 말 건넴으로 연역된다.
자아 내부의 느낌만을 지닌 존재는 그것을 언어로써 외부에 옮길 수 없기에 세계 앞에서 말을 잃었다. 그러나 빛을 잃어 어둠에 잠기는 것을 통해서, 사유로 이행되는 경험을 통해서 말을 되찾는다. 그러나 되찾은 것이 말만은 아니다. 외려 되찾게 된 것은 세계 그 자체다. 그때 세계는 더는 이전과 같이 경험되지 않는다. 일관된 언어. 그렇기 때문에 타당한 언어는 —총체적으로— 세계를 상대하지 못한다. ‘물이 흐른다’거나 ‘돌이 단단하다’는 일관된 진술은 주어진 사태를 동어반복적으로 서술할 뿐, 그 안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모순된 언어는 세계 전부를 총체적으로 포함시킨다. 작업이 물과 돌을 경험하며 “움직이는 것과/정지한 것과/단단한 것과/바스러지는 것이/거의 함께해”라고 할 때, 그것은 서로 배제하는 것들을 모조리 형용하기 때문에 어떤 물도, 어떤 돌도 그 전부를 지시해버린다. A와 ~A가 동시에 참인 것으로 사유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렇게 가능한 모든 테제와 안티 테제의 통일이 사유되는 것. 어둠만이 총체성을 향한 관점을 주었다는 것을 차미혜는 알고 있다. 어둠에서 우리는 돌멩이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어떤 전체의 일부인지를 사유하고, 그 하나만으로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모순된 언어로 발화하는 존재는 불화를 야기한다. 이때의 불화는 모순된 언어와 타당하고 일관된 언어 사이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불화는 외려 모순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더 나아가 모순된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아닌 노이즈에 불과하는 것으로 여겨짐으로써 발생한다. 플라톤의 경우 빛을 보고 동굴로 돌아온 존재가 겪는 불화지만, 여기선 빛에 눈 먼자들에게로 돌아온 어둠을 감각하는 자가 일으키는 불화다. 이민지의 <터널링>에 담긴, 링크는 열렸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편지, 그럼에도 수신자를 찾아 세계를 맴도는 편지는 링크 주소의 부정확함이나 수신자의 부재 때문에 열람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허큘리스 대성단에 도착할 예정인 아레시보 천문대의 콘택트콜이 외계의 수신을 이루지 못하는 것 역시 기술의 결핍은 아닐 테다. 두 수취인불명의 메시지는 모두 모순된 언어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미열람들은 그것이 편지 자체로, 즉 언어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으로 수신되지 못했다. 메시지들은 모순된 언어를 앞서 터득한 이가 보낸 것이다. 그리고 <터널링>이 비로소 메시지들을 읽으려 할 때, 내용들은 과거에서 온 것이지만, 외려 미래를 복귀시킨다.
영상은 구글 어스와 라이브 캠을 통해 메시지의 발신자 K가 경험했을지도 모를 장면을 좇는다. 과거의 장소, 풍경을 담은 장면들은 —최근에 건축되었기에— 현재에는 존재하지만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 혹은 —최근에 철거되었기에—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부재한 것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즉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부정하는 이 부재 때문에 미래는 상기된다. 다만 이때의 미래는 단순히 시간이 흐름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당도하게 되는 산술적 개념은 아니다. 미래는 도리어 늘 같은 것(자본주의, 대의민주주의, 동시대예술, 상대주의 등)을 반복하는 현재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지양止揚적 개념이다. (즉 시간이 흘러도 변화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늘 똑같은 ‘오늘’에 불과하다) 현재라는 시간은 완고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가멸可滅멸적인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이 가멸은 미래의 침략으로부터 이뤄진다는 것. 오랫동안 잊어왔던 미래의 침공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어둠은 더 이상 빛의 농도가 약해짐으로써 저절로 존재하는 의존적 개념이 아니다. 어둠은 도리어 빛을 침략하고 갉아먹는 변화란 모르는 것들에 질색하는 독립된 주체다.
박남수의 「아침 이미지壹」 만큼 어둠의 권능과 역량에 대해서 주목한 시가 있었을까. 여기서 어둠이 무려 “온갖 물상物象”을 출생시킬 동안 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는 결국 어둠이 아침에 이르러 “스스로 땅 위에 굴복한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로서 굴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둠이 발견한 모순된 언어로 된 새 진리는 결국 어느샌가 일관된 언어의 지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간의 새 진리들이 모두 그랬듯. 그러나 그것이 굴복이되 패배일 수 없는 연유는 이제 세계는 고작 현재, 오늘, 지금의 세계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불가역적인 일이다. 이전으로는 결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다. 구나의 작업이 어둠을 매개로 삼고 있는 전시에서 유독 환하게 드러나는 까닭은 그의 작업이 유독 다른 시간대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구나의 작업은 어둠이 헤집어 놓은 세계의 ‘이후’, 즉 미래에 있다. 전시가 이제껏 어둠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이소의), 어둠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차미혜), 어둠이 빛의 세계를 어떻게 침략하는지(이민지)를 통해서 어둠을 전개했다면 구나는 그렇게 완결된 어둠이 어떤 권능과 역량을 지녔는지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낮잠 그릇>은 ‘낮잠’이라는, 빛으로는 가시화될 수 없었던 무형의 상태를 가시화한다. 이때 낮잠은 결코 시시한 개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는 감히 쥐어본 적 없는, 소유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인간만 볼 수 있었던 낮잠이 미래의 시간대에서 모두를 향해 마침내 드러난다. 이 낮잠의 표현은 해방된 시간의 원초적인 상징이다. 그리고 어둠의 가시화는 빛의 가시화와는 철저히 다른 방식을 따른다. 빛이 어떤 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어둠은 그 표현이 결국 훼손이 될까 두려워 진실을 ‘은닉’함으로써 보존하려 한다. 작업이 ‘낮잠’이 아니라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연유는 어둠이 새 감각을, 신세계를 출생시키고도 동시에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오렌지살구햇빛구름>과 <화이트화이트블루스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릇이다. 캔버스 속의 분할되고 연속된 각각의 면들은 투명히 빈 내부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채워질 그리고 다시 비워질 빈 것이 있어 이 안으로 사유가 그리하여 경험이 오래도록 보존될 것이다.
3
한 번만이라도 밤을 새워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빛을 편드는 무리는 어둠이 작고 낮은 것들을 두렵게 만든다고들 하지만, 사실 어둠만이 이 미미한 것들을 위해 있는 미려한 시간이라는 것을. 오직 이 안에서만 샘은 더 또렷이 흐르고, 작은 별들은 간신히 스스로를 드러낸다. 나뭇가지와 풀잎이 마음 놓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풀벌레들이 애틋하게 지저귈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시간뿐이다. 그늘로 자욱한 여기의 고독과 적막은 모두 낮고 작은 것들을 위해 있다. 박지형이 전시 서문 말미에 “어쩌면 이 전시는 탐조등이 보내는 작은 신호와 같은 것이길 바라본다”고 적을 때, 작은 신호는 그것이 나약하기 때문에 작은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을 위한 신호이기 때문에 작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 탐조등은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풀벌레들이 불빛 아래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는 것이 혼자만이 아님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있다. 그러니 너라도 이 어둠에 남아주었으면.
⟪멀고도 먼⟫. 빛으로부터 멀고도 먼 이곳은 마찬가지로 과거로부터 멀고도 멀기에, 미래와 가장 가까운 처소다. 어둠은 눈을 감기 위한 시간이기보다는 눈을 문질러 감각하기 위한 시간이어야 했다. 비평은 이미지로부터 눈을 거두어 미미한 텍스트에 의탁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외면이기보다는 이미지를 늘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빛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것임을, 이미지는 알아주기를 늘 바랐다. 그러나 이 어둠이 행여 그의 무언가를 가릴까 두려울 때면 언제나 떨며 쓸 수밖에 없었다. 흰 종이 위에 검은 텍스트를 붑는다는 것은 빛 위에 어둠을 붑는 일과 같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예술에 대한 어떤 불가능이 숱하게 선언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기쁠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슬퍼할 일이 남아있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려 한다. 어둠이 “상징적인 제약이면서도 무한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라는 박지형의 말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 사랑하므로, 화면을 재우고 커튼을 친다. 그제서야 새빨간 입술. 사랑함으로 불을 끄고 있다. 불을 끄면 잠을 깨워주지 내 사람아. / 조재연
*참조
박남수, 「아침 이미지 壹」, 『박남수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박지형, 「불가해한(fathomless) 질문과 선택적 사유들」, ⟪멀고도 먼⟫ 전시서문, 2021
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현실문화A, 2018
보리스 그로이스, 김수환 옮김, 『코뮤니스트 후기』, 문학과 지성사, 2017
알퐁스 도데, 최복현 옮김, 『별』, 인디북, 2008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주형일 옮김,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 『인민이란 무엇인가』, 2016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소식이 많은 것 같네요! 늘 응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