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서의 4.16 이후

강소이 / https://instagram.com/so_e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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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이 엄중할수록 말은 주춤거린다. 세월호 사태는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사유의 단절점으로 남았지만, 그 이후의 사유가 온전한 말이 되지 못할 거라는 의심을 견디기 힘들고 진실에 누가 될까봐 불안에 주춤거렸다. 그래서 주변의 용기 있는 벗들의 표현과 몸짓에 지지나 환호와 같은 반응 따위의 침묵이 변명씩이나 된다는 듯이 자위하곤 했다. 여전히 의심과 불안이 존재하지만, 글을 놓기로 한 이유는 이번 글쓰기가 어쨌거나 비망록이 될 것이란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비망록이란 “지금으로서는 미처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을 대하면서 당장은 해결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둔 것”이기에 나는 이곳에 사유해야할 과제를 남기고 싶다.

세월호 사태는 기록의 대상을 초과해 “사상적 문제”로 다뤄지길 요청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사상적 문제인 첫 번째 근거는 세월호 사태가 “인식론적 재난의 계기”라거나 “주체의 위기”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세월호 사태의 언급을 저지하고 유가족을 비난하는 한편이나, 세월호의 논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책임과 진실을 요청하는 한편의 공통점은 그 두 편 다 세월호 사태를 팽목항의 사고나 안산의 사고 따위의 지역적이고 특수한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객관의 영역을 초월해 주관적인 영역에 서있고, 세월호를 ‘한국의 위기’인 동시에 ‘나의 일’로서 규정하게끔 한다. 그래서 저마다 ‘나’ 혹은 ‘우리’는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물음하고 어떻게 감당할지를 고민한다. 책임을 부정하며 단순히 지겹게 언급되는 교통사고로 그것을 치부하려는 편조차 오히려 물음과 고민에 대한 대답이라는 점에서 세월호를 객관적으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만약에 세월호 사태의 진실에 대하여 과적된 선박과 부실한 위기관리 따위만 질문한다면 그것은 오직 전문가들만을 주체로 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때 평범한 ‘나’ 혹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자코 낮잠이나 잘” 일이거나 세월호 사태 진상 규명 단체에 CMS나 ARS로 성금을 보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태는 단순히 과적된 선박과 부실한 위기관리 등의 객관적인 이유를 수집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밝힌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유를 알고 있지만 원인은 모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물음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세월호 사태가 “사상적 문제”인 두 번째 근거다. 이유와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어느 날 회사에 다니던 한 엄마가 느닷없이 하교하던 어린 딸이 차에 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자동차의 물리적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이유만으로는 아이의 죽음을 수용하거나 납득할 수 없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일 때문에 아이를 돌보는데 불충실했다고 자신을 탓할지도 모르고 돈을 벌지 않으면 육아가 불가능한 현실을 탓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는 그 이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객관적인 이유가 하나의 사태를 온전하면서 정확하게 해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신될 때, 그 확신은 치열하게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찾으려는 몸짓으로 이어진다. 세월호 사태에서 그것의 공학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 행정적 시스템의 이유의 총 수집으로-물론 그것이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모조리 마침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거나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과 연결됨으로써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사태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요청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세월호 사태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나’와 ‘우리’를 주체로 갖는다는 “주체의 위기”라는 점에서 또 그것이 이유를 초과하는 원인을 물음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사상적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사상적 문제”는 “사변적”인 것만을 의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월호 사태가 “사상적 문제”로 여겨질 때 그것은 객관(적 세계)과도 반드시 매개해야한다. 객관과 매개한다는 것은 당연 공학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 등의 객관적 이유를 고려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객관과의 매개는 (추상이 아닌 객관적)세계와 관계 짓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세계를 매개하여 사상적 문제로 세월호를 사유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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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찌 세월호 사태는 사상적 문제이기는 하나 사변적인 것에 머물 뿐 세계와 매개하려는 물음은 드문 것 같다. 현재의 반응은 그저 “객체 없는 주체, 세계로부터 물러난 채 트라우마-애도-재난-파국 등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체적 위기를 반성하는 주체”의 번성에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를 “사상적 문제”에 맞닥뜨리게 만들었던 일련의 사태들이 모두 그러했다. ‘촛불시위’ 이후 참여가 윤리적 의무로써 독려되고 수없이 통보되었을 때 그 자리에 모인 다중은 추상적인 세계를 상대했다. 추상적인 세계란 어떠한 도덕적인 거악 앞에서 “모두 동등한 보편적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무엇”으로 다가오는 도덕이나 감성으로 감각되는 주체”만” 존재하는 세계 없음의 세계를 가리킨다. 그것은 도통 그 세계가 무엇인지 규정하지 않고, 해결해야할 사태의 총체 속에 등록되지 못한 채로 세계를 부정하려는 몸짓인양 활약하지만 오히려 부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사상적 문제”가 “사변적”인 것에서 머물 때 그것은 고통을 겪는 심리적인 개인을 전면에 내세울 뿐 그들을 투쟁 속의 집단적인 사회적 주체 혹은 계급으로서 재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여전히 정치란 도덕적인 것임을 재론하면서 우리에게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떻게 감당할지만을 묻는 “세계 없는 주체의 자폐적인 반성”으로 내몰 뿐이다.

반면 객관과 매개하는 “사상적 문제”는 주체를 규정하는 일이 부정하는 대상을 규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정치란 (도덕적인 것이 아닌)윤리적임’을 재론하는 것이다. 정치의 도덕화가 정치를 도덕적인 규범으로 환원하며 주체만을 따진다면 정치의 윤리화는 부정하는 주체를 규정하는 일과 부정하는 대상-객체(세계)를 규정하는 일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공학적인 이유, 경제적인 이유나 행적적인 이유 등이 우리가 사상적인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사태와 사태마다의 도덕적인 규범으로부터 어긋나는 부정, 부패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객관적) “세계”의 총체 속에 등록된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선언은 세월호 사태가 놓여있는 세계란 결국 과적된 선박, 부실한 위기관리 그리고 완화된 규제 등의 이유를 생산한 결국 자본주의로 규정함과 동시에 그 투쟁 속의 주체를 사회적 주체 혹은 계급으로 재현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상적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객관적인 문제로서의 세월호 사태라는 문제에 이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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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현재에 범람하는 “국가”를 물음하는 것 역시 그것이 “사상적” 문제와 “객관적” 문제를 결합한 차원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결론이 된다. ‘국가가 무엇인가’라거나 ‘이것이 국가인가’라고 물음할 때, 그 대답이 향하는 것이 가장적인 국가라거나 모든 삶의 문제를 돌보는 목자와도 국가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물음은 쉽게 신자유주의 비판에 궤를 같이 하거나 편승한다. 그러나 안전을 방기하며 공안과 형벌에만 유능한 국가라는 식의 신자유주의적 비판은 그렇다면 국가를 다시 불러들이자는 것일까. 해방적 정치가 기댈 것이 혹은 도달할 곳이 결국 그 정도의 시도라면 그것은 너무도 무책임하면서도 성의 없는 해답일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사회적 총체성을 직접적으로 대의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풀릴 뿐이다. 이 환상은 낡은 것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치가 있는 “계급국가”라는 개념을 단숨에 제거해 버린다. 계급국가란 개념은 국가란 결국 지배계급의 국가이거나 계급지배의 도구임을 가리킨다고 해서 그것을 굳이 틀리다고만 말 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이 주장에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현대 국가는 주권적 국가로부터 안전기구의 메커니즘으로 전화한 이후 더 이상 정의나 공공선과 관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국가’라고 개념 지어지고 ‘복지국가’로 칭하는 형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지식, 장치 제도, 법률 등의 권력 시스템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국가란 애초에 일반의지와 공공선을 강제하고 관철하는 국가가 아니며 신자유주의적 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적게 통치하는 국가, 변화하는 사실의 세계에 따라 사회적 내용을 관리하고 조직할 뿐인 국가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가 창궐하고 그것이 국가의 근대성을 자처한 시기에서부터 이미 국가의 쇠락은 예정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는 대단히 급진적이고 진보된 입장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계급국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은 척 국가가 사회적 총체를 대의할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불러내거나 충분하지 않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을 복습하는 상당히 퇴행적인 주장이다. 대문자로 쓴 정치가 가치의 권위적 분배 따위로 표현되는 사회질서의 조직과 관리의 기술적인 조작이 아니라 잘못된 세계를 바로 잡기 위해 과거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창안하는 것이라면, 또 사회적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회) 그 자체를 창설하는 것이라면 이 주장은 조금의 정치를 수행할 수도, 세월호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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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의 감축과 큰 위기를 감수하는 것은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재난을 낳는다면 그 기회는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으며 재난을 키우면 키울수록 수요는 더욱더 창출된다. 세월호 사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금융 위기 이후 목격되는 세계에 창궐한 자본주의적 위기의 궤도이다. 이 궤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의 위상만큼이나 재현불가능한 것처럼 괴리해 서있다. 반면에 각각의 위기에서 우리는 사태와 사태마다의 분노와 우울, 고통만이 호소되거나 그 감각의 체험에 열중하고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주체의 주관과 체험이라는 현상만이 오로지 존재한다는 현상학자의 세계 없음의 반복적인 중얼거림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사상으로서의 4.16 이후’ 존재해야 하는 것은 이 둘의 괴리를 좁히는 즉, ‘매개’다. 이 매개는 정치의 윤리화라는 성질을 띠고 있으며 ‘부정’이라는 적대하는 주체를 규정하는 동시에 세계를 규정한다. 계급투쟁은 아마 그런 발견이었을 것이다. 계급투쟁은 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따를 때, 노동자가 근면함을 미덕으로 하는 산업역군이 아니라, 수로 친다면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가진 자들을 위하여 노동하는 계급이라는 주체적 위치의 전환은 주체 이상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발명해낸다. 그 세계는 다른 좌표 위에 배치되고 노동자는 그 세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라고 요청받는다.

4.16 이후의 매개에서도 여전히 그 적대의 배치를 만들 존재론적 세계는 자본주의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본주의적 적대와의 대면을 회피하고서 많은 근대의 사상가들이 근대성과 합리성 혹은 통치성 등의 개념을 헤매이거나, XX사회 식의 추상적인 부정 등의 논의를 통해 새로운 존재론적 세계를 발명하려고 했지만 그 발명들은 자본주의의 일순간의 풍속과 같은 언저리를 미학적 원근법을 뽐내는 세계 없는 주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모든 것이 환원될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며 비망록임을 내세워 논쟁의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는 자본주의적 적대와 회피할 수 없고, 대부분 한 줌을 제외하고는 그것과 대면하고 있음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 조재연

*참조
– 서동진,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_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 생각하는 정치」, 《변증법의 낮잠》
– 쓰루미 슌스케, 「일본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사상으로서의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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