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가 앵무새가 아닐 때_진영: happy island

진영, , 2017, 대안공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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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업이 갖게 되는 영토가 하나의 캔버스일 리가 없다. ‘의미’가 미끄러지는 것이라면, 그래서 작품은 늘 작가보다 말이 많은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동시에 작업의 구획도 늘 범람하고 침범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찰하는 ‘존재’ 스스로 작업의 영토 안으로 걸음하는 것을 또한 전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나의 작업의 영토가 고작 하나의 액자 따위일 리 없으니, 시선은 프레임 안을 집요하게 서성이고 또 요동치다가 마침내 구획을 벗어나 외부로 나간다. 한 작업의 가장자리와 둘레가 연장된다면 그 장소에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혹은 한 작업은 하나의 세계에 일부분에 해당되는 조각이기에, 그 조각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만 현상되도록 허락한 필연성이 외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작업을 여전히 보기보다 ‘읽기’의 대상으로, 그래서 여전히 한시적인 표정만을 제시하는 이모티콘보다 징후와 징조로서의 ‘텍스트’로 가능하게 만든다. 그때의 불변항이 피사체와 그 배경을 담은 프레임을 넘어서는 ‘외부’가 있다는 암시다. 즉, 프레임은 자폐된 표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존재에게 세계의 나머지를 충동시킨다는 것. 그로부터 읽는 것을 수행하는 존재는 결국 알게 된다. 그 외부에 위치한 것 중의 하나가 스스로였다는 것을. 이제 존재는 작가의 말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움직이면서 그 작업을 자신이 그렇게 허락했다는 필연성에 대해서 스스로를 추궁해야 한다.

누구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습작 혹은 창고에 잠겨진 그림과 관객이 애타게 읽은 그림에는 어딘가 남은 ‘때’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작업이 범람할 때, 마땅히 그 번짐을 허용하고자 그 가장자리를 서성이는 존재는 아마도 이윽고 작업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다음엔 작업과 존재의 양쪽에 때 같은 영구적인 잔상이 남겨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른다’라고 적어놨다가 전시를 보고 나서는, 역시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작가 진영의 《happy island》에는 그런 스미고 번진 후의 잔상들이 영원히 남아있다. 서있던 곳은 섬의 가장자리였을까 혹은 바다의 언저리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려다본 것이었을까. 행복한 섬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조금은 다분한 의미에서 침체되었다.

세 개의 장소가 있다. 먼저 하나는 공원(<happy island> 연작)이고, 두 번째 것은 숲(<treasure hunters> 연작)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은 공원에 있고, 빛이 들기 전까진 숲에 있는다. 공원은 휴식의 쓰임새를 가졌고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공간이다. 그러나 숲은 다르다. 숲을 다니기 위해서는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욕망하고 발견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이것은 달리 얘기하면 향유하는 동안에는 무엇을 찾지도 욕망할 수도 없으며, 그리고 무엇인가 찾고 욕망하는 동안에는 향유하거나 휴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두 공간 위로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들은 대개 그들이 앵무새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같은 행동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공간(<natural space>)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 형상들은 제각기 행동한다. 《happy island》를 ‘읽는’ 것으로 만드는 문제성은 여기서 시작한다.

2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이 서로의 행동을 모방할 때 ‘그들은 왜 모방을 하는가’라는 물음은 결코 드물 것이고, 뻔히 대답된다. 그들은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이니까. 어째서 앵무가 등장하는지 물음할 수 있지만, 이 앵무들이 어째서 모방을 하는지는 물음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 사회는 내러티브들 즉, 시나리오들에 의해서 구축된다. 카페나 음식점의 점원, 도서관의 사서, 극장의 안내원 등의 A가 주문(order)되면 B로 반응되는 식의 ‘인물적 역할’부터, 지하철 플랫폼, 교실 등의 C라는 공간에서는 D~F까지의 지문과 대사만이 허용된다라는 식의 ‘공간적 역할’들까지, 이들은 그 시나리오의 함유물이다. 존재는 어느 공간에 가서든 거시적으로는 법에 의하여, 미시적으로는 관습과 문화에 의하여 어떠한 역할을 부여 받으며, 그리고 그 역할의 습득과 계승은 때때로 ‘사회화’라고 명명되는 모방이란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심지어 두 가지 다 확신이 없을 때에도, 인간은 주위의 다른 이를 모방한다- 그러니 앵무새가 모방을 하는 것처럼 인간은 아무렴 앵무새 머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나리오가 한 주체의 행동의 기준과 규범이길 넘어서서, 인식에서 마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때 발생한다. 어떤 시나리오는 한 인간이 점원으로서, 안내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은 지나치게 인간을 역할로 고정시킨다. 점원은 점원의 역할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커피 자판기이며, 안내원 역시 안내를 하는 ‘인간’이기보다 고작, 숨을 쉬는 네비게이션으로서 드러난다. 인간은 타인의 역할 말고는 그 어느 것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가 아침은 먹고 일하는지, 건강한지, 그리고 그가 착취당하거나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그 어느 것도 물음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음하지 않을 때, 타인은 역할에 고정되고 응고된다. 그로써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마르크스의 오래된, 그렇지만 정확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물화(物化, Verdinglichung)다. 사물이된 인간. 아마도 갑질, 도구화, 착취, 폭력과 같은 자본주의의 불명예들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때 사물이 인간의 지위를 되찾는 방법은 역할의 여집합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 혹은 대학생이라는 것, 어떤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 등. 자본주의의 불명예로 지적된 일들이 고발되어질 때, 고발자 혹은 비판자는 역할 이외의 것들로, 시나리오 안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시나리오 밖의 언어에 의지해 사물을 설명하려 한다. 그 순간에 이제껏 그의 ‘역할’만을 드러냈던 사물은 비로소 역할을 제외한 나머지를 드러내면서 사물이기를 멈춘다. 이때 사물이 -사실은 남몰래-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역할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란 ‘생활(leben)’이다. 그것은 한 존재의 일상적 삶의 세계를 드러내는 사소하지만 단단한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이 ‘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물화는 그 효력이 유예된다.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자. 공원과 숲에서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은 이와 같은 물화가 예정되어 있다. 이 고정에는 ‘인물적 역할’과 ‘공간적 역할’이 함께 부려진다. 앵무새의 특징이 모방인 것은 맞지만, 오직 모방만이 특징인 것은 아니다. 그는 일부일처제를 따르고, 사회적인데다가 대개 초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때때로 육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외의 것들에도 불구하고 앵무새의 역할은 모방이기에, 모방을 제외한 특징은 소거되고 ‘모방’의 역할로만 고정되어 인식된다. 여기서 먼저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에 대한 인물적 역할로의 고정이 발생한다. 그리고 공원과 숲에서도 역시 공간적 역할로의 고정이 발생한다. 공원과 숲은 그자체로 다양한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각각 향유・휴식 그리고 찾기・욕망만을 허용하고, 또 서로를 배제한다. 이제 남은 것은 향유・휴식과 찾기・욕망만을 각각 반복하고 모방하는 사물인 것만 같다.

이렇게 두 층위의 고정으로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에 물화는 예정된다. 단, 세 번째 공간이 발견되기 전까지. <natural space>는 두 공간 사이에 ‘생활’의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예정된 물화를 유예시킨다. <natural space>의 형상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을 쥐고 있으며, 각별한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모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그 공간에 특별한 시나리오가 부여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모방으로만 형용 가능 했던 그들이, 이 장면에서는 -모방을 제외한-시나리오 밖의 언어에 의지해 설명된다. 그 때 확인되는 것은 ‘모방’하지 않는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의 ‘존재’이거나, 그가 ‘모방’을 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지거나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물’이었던 객체가 생활 그러니까 ‘삶’을 가진 주체로 그 지위가 복원될 때, 같이 되살아나는 것은 ‘세계’란 낱말일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허락한 시선 외부. 그리고 그들을 객체로 대우했던 -관찰자-스스로에 대한 발견. 그런 후에야 존재는 물음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물을 수 있다. 그들은 왜 모방을 하는가. 왜 두 공간에서 앵무는 어째서 ‘모방하는 앵무’로만 드러나야 하는가. 모방하지 않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며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작업은 구획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지시한다. 전시장의 작업물들은 이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세계의 외부는 존재한다. 캔버스 위로 등장하지 않은 외부의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을 발견하기 위하여 또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의 외부를 향하여 존재는 이제 작업을 읽어야 한다.

3
작업의 구획을 벗어날 때 ‘읽는’ 존재가 눈을 맞추게 되는 것은 지금, 여기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이다. 말했듯 세계는 시나리오로 구축되어 주어져있다. 이것이 ‘주어진’ 것이라고 서술될 때 의미하는 것은, 세계란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한 것이니 어떠한 가감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그러니까 존재는 시나리오에 박혀 하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사니리오 밖에서 스스로를 관찰할 여력을 갖기란 좀처럼 불가능하다.-특히 타인에 관하여는 더더욱- 그러나 작업이 범람할 때, 존재는 사실 스스로가 위치한 곳이 작업 ‘내부’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투영하고 동일시하게 되는 것은 공원과 숲에서의 형상일지도 모르겠으나, 발견하게 되는 것은 <natural space>로 표현되는 세계 ‘외부’이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한정된 행위에 대한 모방을 허락하는 세계에도 외부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외부에 대한 증명이 이미 존재 앞에서 끝났다는 것.

이제 존재는 처음으로 의심할 수 있다.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세계의 외부는 존재하고 그것이 이미 증명되었으므로 ‘다른’ 세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위로 존재 주변의 사물들이 생활하는 삶으로 복원되고, 존재는 주어진 세계에 부역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세계를 다르게 읽는 주체의 지위에 오른다. 전시장을 나가는 주체는 이제 하나의 역할로 드러난 타인을 마주할 때, 역할 너머의 여지를 찾고자 주춤거릴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진실에 도달한다는 것은 늘 드러나지 않는 것들로부터 가능하거나, 감추어진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드러난 것으로만 타인을 취급했을 때 그것은, 타인을 지금의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응고시킬 것이라는 두려움. 그것이 존재에게 잔상처럼 남는다. 마침내, 전시는 감각을 바꿔내기를, 또 그래서 경험하는 것이 변화하기를 종용하는 것과 같다.

작가 진영의 개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내용’보다는 ‘형식’쪽을 따져보는 게 옳을 것이다. 《happy island》는 귀엽고 흥미로운 동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가장자리에서 앞을 정확하게 비틀기에 빛난다. 숲, 공원,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까지 그들은 모두 상징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설득력을 갖춘 상징은 캔버스라는 가상을 숲과 공원에 도착한 존재에게 ‘실재’로 표상하게끔 만든다. 하나의 역할만 허락받거나, 그에 함몰하도록 요청되고, 휴식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가 서로를 배제하거나 철저히 격리된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 그러나 전체적인 작품에서 가장 애매한 특징을 가진 <natural space>는 그 애매함 때문에 전체에서 가장 강한 예외를 만들고, 그 예외 때문에 전시에서 흐르는 일관된 서사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해석을 해내도록 요청한다. 가상이 진실이 되었다가, 이윽고 그 진실 자체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 균열 사이로 작업은 범람하고 침범하고, 존재는 스며들고 번진다. 앵무새가 앵무새가 아닐 때 《happy island》는 귀엽고 강하고, 풍부하다.

서두에서 누구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습작 혹은 창고에 잠겨진 그림과, 관객이 애타게 읽은 그림의 ‘때’가 다를까하고 물었었다. 내가 본 것은 가상, 진실 그리고 그것의 균열을 오가며 주춤거리고 흔들린 다음 남았던 잔상들이었다. 그것들이 있다고 믿었다. 누군가, 누구나 전시를 본 후, 타인이라는 사물에 관한, ’진실’에 관한 가책을 안고 나가야 했다. 그 위치가 섬의 가장자리였든, 바다 언저리였든, 내려다 본 것이든 존재는 본 것에 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그 가책에 대한 어쩔 줄 모름이 전시의 끝에 유의미하게 침체를 남긴다. / 조재연

/ 대안공간 눈 ‘새싹 이음 프로젝트’ 기고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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