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아는것은 위험한 것이다. 깊이 마시지 않을 거라면 피에리아의 샘물을 맛보지 말라.” 알렉산더 포프는 그의 장시(長詩) ‘비평에 대한 에세이’(An Essay on Criticism, 1709)에서 그렇게 말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모름마저도 알기에 더 알려고 노력하겠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그가 다 안다고 생각해서 더 알려고 하지도 검증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포프는 그것을 취한 뇌라 불렀다. 그래서 말은 더 커지고, 행동은 거칠게 실현된다. 그러다 이윽고 타인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조금 알았기에, 다 아는 사람인 척했던 나는 지금까지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중에서도 여전히 기억에 끈질기게 머무는 부끄럼과 죄는 「민영아 어디서 잤어」라는 글을 쓴 것이었다. 나는 상처를 낸지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른지도 모르고 글을 쓰고선 정말 오랫동안 자랑스러워 했다.
글에는 ‘민영’이 등장한다. 민영아는 글에서 대상으로 삼았던 ‘민영화’의 의인화였다. ‘민영’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던 산이의 「어디서 잤어」와 접촉되 하나의 패러디식의 글을 구성한다. 그리고 「어디서 잤어」의 미소지니를 계승하는 것과 별개로 미소지니를 재창조하고 반복한다. 이 위에서 여성은 권력적 제물과 폭력의 대상을 지나 윤리적으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대상이 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미소지니 안의 여성을 경유하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는 비판이라면 그것은 옳은 비판도 타당한 비판도 되지 못한다. 타당한 정치 비판이 있어야할 자리에 풍자와 해학이란 위선적인 허물을 뒤집어쓰고, 그곳에 여성을 소환하여 비판의 부재에 대한 알리바이를 해명한다. 권력을 여성으로 만든 뒤에야 가능했던 오물같은 비판은 결국 글쓴이의 무능력으로 미소지니를 재생산하고 그로써 위축된 성을, 상처받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구조에 기여했다.
그러곤 한참동안 기뻐했다. 심지어 참담하고 악랄한 것은 이 블로그에 「TAKE A MEMO 01」란 글처럼 그것을 내 글쓰기와 사회에 대한 태도에 준거점이자 능력의 증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폭력은 정의와 같은 대의나 선의와 결합되었다고 믿어질 때 제일가는 악을 낳는다. 특히 그것이 구조적 폭력일 때 그 악취가 은밀히 오래가는 법이다. 조금 아는 사람이 쉽게 쓴 그 글은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없이 위선적이며, 비겁하고, 무능하면서, 악랄하다. 그것을 뱉는 나다. 이글 내내 맘에 드는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숨기려고하거나 주저하고 있는 그것을 뱉는 나다. 아마도 그날의 나와도, 흐르는 나와도 악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망록은 지금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나중에라도 풀기 위해서 남기는 글이고, 참회록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앞에서 나는 많이 아는 사람은 스스로의 모름마저도 알기에 더 알려고 노력한다고 썼다. 지금 나는 조금 아는 사람이지만 그 위태로움을 알기에 많이 알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이를 참회라고 하기엔 깨달음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싶다. 이글을 참회록이 되기위한 비망록으로 남긴다.